김영환 < 민주당 대변인 kyh21@kyh21.com >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아버지라고 말한다.

그런 내게 "뭔가 새로운 것 없어요? 이제 식상해요"라고 아내는 말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생각과 행동에는 지금도 속속들이 아버지의 영향이 스며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이 사랑의 뿌리를 좀더 곱씹어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아내의 말대로 그 기억의 많은 부분은 연민으로 가득차 있다.

이 땅에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힘없는 이들에 대한 연민 말이다.

그 중에도 나는 ''글 모르는 아버지''를 부끄럽게 생각해 왔다.

아버지는 소위 까막눈이었다.

학교라고는 문 앞에도 못 가본 그였다.

그 시절의 이 나라에 흔하디 흔한 초상(肖像)이었다.

어린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아버지는 시골에서 조그마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가 외상값을 받기 위해 농협 소장님께 청구서를 보내게 되었다.

청구서 맨 위에 글을 잘 모르시는 아버지는 씩씩한 글씨로 ''농협 송장님께''라고 적으셨다.

나는 언젠가 낄낄대며 동시(童詩)를 적어두었다.

''농협 소장님께 글 잘 모르는/우리 아버지가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다 농협 소장님을 농협 송장님으로/써 보냈다.

/며칠 후에 농협 소장이 우리 집에 오셔서/아빠를 보고 자꾸 웃으시는데/옆에서 보니/아빠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는다''

지금은 그리움이 되었지만 어린 나에게 그 일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얼굴을 붉히곤 했다.

서울에 올라와 대학을 다닐 때까지도 솔직히 많이 배운 부모를 가진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이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살아가면서 또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못 배우고 가난했던 그가 나에게 쏟은 희생과 사랑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나의 가슴 속에서 숨쉬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야말로 남들에게 없는 나만의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음지(陰地)에서 한숨짓는 사람들에게 따뜻하게,조금 더 겸손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 가슴 속에 살아있는 아버지의 초상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