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엘 다녀왔습니다.

미당의 시구처럼 ''동백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연초록의 맥문동 잎들만 나직하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선운사 동백꽃이 다른 데보다 늦게 핀다는 것을 식당집 주인에게 듣기 전까지는 몰랐지요.

점심을 먹다가 나무 탁자 위에 못으로 눌러 새긴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을 발견하고는 그만 목이 메었습니다.

동백숲은 절마당 초입부터 대웅전 뒷산까지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몸을 부비며 꽃샘 바람을 막아주는 모습은 장관이었지요.

기록에는 삼천 그루나 되는 그 동백나무 숲속에 늙은 줄사철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고 씌어 있습니다.

한참동안 그 나무를 찾았지요.

결국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내내 그 나무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동백꽃을 보러 갔다가 동백은 못보고 오히려 ''없는 나무'' 한 그루를 덤으로 마음에 넣고 온 셈이지요.

선운사 동구에서 20여분 거리에 미당의 생가가 있습니다.

동네 이름도 선운리입니다.

마당에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그 집은 금방 눈에 띄지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늙은 집,마루는 다 내려앉았고 흙벽도 허물어져 밤이면 곳곳으로 별빛이 비쳐드는 집입니다.

질마재 신화가 줄줄이 흘러나오던 그 집의 뒷봉창으로 무심한 바람만 드나들고 있었지요.

그곳에도 동백은 없었습니다.

동백꽃은 하늘을 보고 피지 않습니다.

옆이나 아래를 보고 다소곳이 벙글지요.

그 매무새에서 겸손하고도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꽃.

''꽃나무는 시방 어데 가서 있는가/ …/ 그 꽃씨들이 간 곳을 사람들은 또 낱낱이 다 외고나 있을까''(서정주 ''무의 의미'')

꽃나무 하나에서 영원의 향기를 맡던 시인은 이제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시의 뿌리는 해마다 더 푸르고 붉게 되살아납니다.

여행중에 펼치는 시집 한 권은 그래서 ''무성한 활자의 숲에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줄사철 나무''와 같습니다.

책 한권이 숲 하나라는 말이 있지요.

그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은 스스로 필요한 것보다 많은 잎을 달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새와 벌레의 먹이가 되고 가을에는 낙엽으로 내려 거름이 되지요.

꽃에서 나는 꿀과 향기,수많은 열매를 아낌없이 나눠주는 나무.

이 봄날 동백나무 그늘 아래에서 책을 읽는 당신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잎이 무성할수록 수액도 풍부하다고 했지요.

이번 주말엔 그 향긋한 풍경화 속으로 즐거이 걸어들어가 볼까요.

가는 길에 미당을 만나거든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늦은 안부라도 전하시지요.

내친 김에 백석이나 정지용을 거쳐 잃어버린 옛 발해의 시인 원고까지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여행이 되겠습니까.

동행이 없다면 늙은 줄사철 나무 한 그루처럼 지도에 없는 길을 혼자 걸어가는 모습 또한 아름답습니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