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암호 같지만 사실은 휴랫팩커드사가 만든 전자계산기 이름이다.
대부분 MBA들이 2년 과정의 시작과 끝을 이 계산기와 함께 한다.
애칭도 걸맞게 "비즈니스 컨설턴트"다.
데이터만 집어 넣으면 즉각 솔루션을 내놓는 통계 분석, 모의실험(simulation)용 소프트웨어들이 넘치는 현실에서 전자계산기만 해도 아날로그 냄새가 풍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런 전자계산기가 중요한 이유는 문제를 찾아내고 그걸 수식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전자계산기는 그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보조수단이다.
MBA 과정은 문제를 찾아내기 위해 기업의 여러 활동과 수치들을 쪼개고 가르는 분석 훈련의 연속이다.
2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매니저로서 알아야할 비즈니스 전반을 다루기 때문에 수박 겉핥기식이 되기 싶다.
분석 훈련은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됐지만 발전을 거듭하면서 이제는 MBA를 상징하는 "특기"로 변했다.
분석훈련의 두 가지 큰 축은 케이스(case) 분석과 수리적 접근이다.
하버드비즈니스스쿨에서 고안된 케이스 분석 방법은 법대에서 다루는 판례분석를 연상시킨다.
판례가 실제 사건에 대한 기록과 그에 따른 법원의 판결을 담고 있는데 반해 MBA 케이스는 답이나 해결책이 전혀 없다.
등장인물과 각종 수치가 약간 변용된 채 실제 있었던 사건이나 상황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학생들은 각자 케이스의 주인공이 돼 현상을 분석하고 핵심 문제를 찾아내 자기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1학년 "전략" 과목을 예로 들면 <>5 Forces<>전략집단<>게임이론<>가치사슬<>경쟁우위<>핵심역량<>다각화<>수평통합<>포트폴리오기법 등의 개념이나 분석도구를 다루지만 어느 것 하나 교과서에서 배우는 게 없다.
대신 닌텐도, 월마트, 반즈&노블, 아마존, 매킨지, 디즈니, 시바가이기, 야후 등 각 회사의 케이스를 다루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들 개념과 도구들을 익히고 써먹는 훈련을 하게 된다.
전혀 다른 대안을 내놓는 학생들이나 교수와 논쟁을 벌이는 것은 이런 도구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심화단계다.
수리적 분석(Quantitative analysis)은 객관적인 설득력이란 결국 "숫자"로 얘기할 때만 확보된다는 철학에 기초해있다.
재무 회계 생산관리 등은 전자계산기가 시험은 물론 수업시간에도 필수다.
프로젝트의 현금창출 정도를 계산하고 각종 금융상품의 값을 매기는 연습을 해야 하는 재무 과목 답안지는 그래서 고등수학 문제와 다를 바 없다.
최신 소프트웨어들도 자주 동원된다.
"마케팅 전략"을 예로 들면 한 한기 내내 4-6명으로 구성된 팀이 회사 하나씩를 맡아 경영 경쟁을 벌인다.
일정한 예산과 제품이 주어진 사이버 시장 내에서 각 팀은 모두 일곱 차례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시장이 성숙되지 않았는데 신제품을 출시했다 부도가 나는 수도 있다.
반대로 보수적인 시장전략을 고집하다 예산은 써보지도 못하고 제품 재고만 안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한 번 결정을 내릴 때마다 각 팀은 온갖 경우의 수를 고려하기 위해 계산기를 두드려야 한다.
수익 예상치가 가장 높을 때 광고를 집행하고 신제품을 내놓는 것은 "직관"으론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케이스분석이나 수리적 접근은 결국 분석대상 기업에서 핵심 문제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넘치는 정보, 급변하는 시장, 종잡을 수 없는 고객, 경쟁하는 부서들.
그 한 가운데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횡으로 종으로 갖가지 상황을 고려하는 분석방법이 동원될 수 밖에 없다.
MBA과정이 기르는 "눈썰미"란 바로 이런 분석적 훈련에 기초한 것이다.
문제는 분석적 도구들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에 대해서 MBA들이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분석적 도구라는 나무에 갇혀 숲은 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걸 메워주는 것이 이전의 직장 경험이다.
말이나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비즈니스의 "여백"을 맛본 사람들이 숲을 놓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분석도구란 기껏해야 HP19B 계산기처럼 사람의 최종판단을 도와주는 보조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MBA를 직장생활의 연장선상에서 그것도 장기적인 경력관리 계획하에서 고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경닷컴 주미특파원.와튼스쿨 MBA 재학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