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양 < KAIST 대학원 교수 .정책학 >

지난 1997년의 경제위기를 맞기까지 우리는 짧은 기간에 빠르게 성장해 왔다.

경제는 고도성장을 했고 정치는 민주화되고 있었으며,사회는 다원화되는 가운데 국가 전체의 개방화가 급속히 진전되어 왔다.

가진 것이라고는 성실한 인적 자원과 뜨거운 교육열밖에 없었던 우리가 짧은 기간에 국가 전 부문에 걸친 광범위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업가의 노력과 근로자의 희생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와 비슷한 상황의 다른 나라들이 갖지 못한 우수한 정책관료집단과 양질의 정책능력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뛰어난 인재들이 정부에 들어가 사명감을 갖고 밤낮으로 일한 것을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경제개발기와 성장기를 지나오면서 정치 경제 환경이 급속히 바뀌는 가운데 우수한 정책관료 집단과 양질의 정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급격히 식어가고 있다.

이와 함께 정책관료집단의 상대적인 자질과 능력이 점차 저하되고,사회적 평가와 사명감 또한 크게 낮아지고 있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지난 경제위기도 따지고 보면 정책의 질적 저하가 누적된 결과이며,경제위기의 구조적 극복이 어려운 것도 정책의 질적 수준이 높지 못한데 그 주요 원인이 있다.

최근의 의약분업 및 의료보험 재정문제와 사학분규 및 교육붕괴 현상도 정책의 질적 저하를 나타내는 단적인 예다.

민간부문이 성장할수록,그리고 정책환경이 전문화되고 복잡해질수록 정책의 수준은 보다 높아져야 한다.

정책의 질은 정치 수준 등에도 영향을 받지만, 무엇보다도 정책관료의 질적 수준과 사명감에 크게 좌우된다.

최근 들어 우수한 신규 인력이 정체된 정부부문보다 민간부문을 선호하고 있고, 우수한 정책관료가 민간부문으로 이동하는 등 정책관료집단의 질적 수준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이는 정부부문도 우수한 인력 확보와 유지를 위해서는 민간부문과 경쟁해야 한다는 인식이 결여된데 그 근본원인이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정책환경 또한 급속히 변화하여 정책의 질을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우선 ''정책 잘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경제규모의 확대와 국제화의 진전으로 정책과 관련된 고려요소가 크게 늘어난 가운데 높은 수준의 전문성이 요구되고 있고, 이해집단의 목소리도 더욱 다양화.전문화되고 있다.

건전한 상식과 일방적인 지시만으로는 정책실패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종합적이고 질 높은 정책을 제때에 내기가 어렵게 되고, 또 누구도 섣불리 정책을 내놓지 않으려는 일종의 AIDS(후천성 유인 결핍증)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사후약방문식.임기응변식 대응의 주요 원인이 된다.

다음으로는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지식정보사회의 진전으로 소위 ''지식역전(Knowledge Reversal)''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다.

지식역전이란 의사결정권을 가진 상급자들이 중하위 조직원보다 쓸만한 지식이 부족한 현상을 말한다.

상급자들이 몇십년전 학교에서 습득한 지식과 그동안 쌓아온 경험은 빠르게 감가상각되고 있는 반면, 중하급 조직원들은 최신 지식과 높은 지식습득능력을 갖고 있고 연수 등 교육기회도 이들에게 집중돼 있다.

하의상달과 의사결정권의 위임 및 분산이 어려운 유교적 조직문화와 연공서열식 승진체계하에서 지식역전은 곧 정책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게 된다.

개방형 임용제도 아직은 제한적이고 미미한 상태다.

우리는 그동안 높은 교육열과 양질의 정책을 밑바탕으로 하여 살아왔다.

그러나 이 두가지가 위협받고 있다.

교육은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수준인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다.

개혁 추진체가 돼야 할 정부부문에서도 갈수록 어려워지는 정책문제를 앞에 두고 정책의 질적 향상을 위한 노력은 미미하다.

여기서도 AIDS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책업무 및 조직체계의 개편, 우수인력의 확보 및 유지, 보수의 적정화, 정책연구기관의 효율화 등 정책의 질적 저하를 막기 위한 종합적인 청사진이 조속히 마련돼야 하며, 이를 실천하는 강력한 지도력이 따라야 한다.

정책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정부부문의 재창조에 나서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