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鄭회장의 두가지 足跡 .. 이호철 <소설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이호철 < 소설가.예술원 회원 >
아산(峨山)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타계 소식을 접하면서 그이가 이 나라에 남긴 두가지 족적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50여년 전의 6.25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농업국가를 불과 40여년만에 세계 10위권의 신흥 공업국가로 탈바꿈시켜 놓은 몇 안되는 주역 중의 한 사람이 그이라는 것.
게다가 학력은 겨우 시골의 ''보통학교'' 졸업이 전부이다.
둘째는 3년 전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소 1천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가 50년 동안 꽝꽝 닫혀 있던 남북한의 물꼬를 처음으로 뚫어 냈다는 것….
그렇게 별별 희한한 일화들이 영국의 아동 교과서에 게재되었을 정도로 수다한 신화들을 남겨 놓았다는 점.
이상의 두 가지 족적만도 엄청난 것이다.
하지만, 70년대와 80년대에 재야 운동으로 두어번 감옥에까지 들락거리고 육군본부에서 군사재판까지 받았던 필자 같은 사람에게 가장 큰 감회로 새삼 다가온 것은 다름이 아니다.
오로지 그이만이 그렇게 온 몸으로 해낼 수 있었던, 당시 천편일률적이고 진부하게 겉돌던 재야권에의 신선한 직격탄이었다.
야아 저 봐라, 저 봐라, 저게 대체 뭔고?
뭐라는 것인고?!
문익환 목사나 임수경양과는 전혀 만나는 양태가 다르지 않나.
저게 대체 뭔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그이다운 그 날카로운 직관과 순발력이 일궈낸 우리 사회 ''지식인 세계''에의 엄청난 충격과 지적(知的) 패러다임 변화야말로 몇마디 말로 계량할 수 있는 것이 애초에 아니었다.
진보? 보수?
그런 따위 곳곳에서 잘난 척하던 무거운 어휘들이 그이의 그 행적 앞에서는 일거에, 하루 아침에 빛 바랜 허수아비로 떨어지던 것이다.
모름지기 현실적으로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일이란 바로 저런 것임을 절감케 해 주던 것이었다.
지난 70년대 한 때 사회일각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였던 경부고속도로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현대 정주영 사장의 합작품이라는 소리까지 있지 않던가.
그렇게 이 나라 경제의 첫 초석이 놓였던 것이었다.
필자는 98년 여름 그이가 소 몰고 판문점을 넘었을 때도 그 현장 취재차 판문점까지 가 본 일이 있거니와 그 때도 현대측 임원 한사람에게서 다음과 같은 기이한 이야기 한 토막을 들었다.
그 해 초에 신년 하례차 댁으로 찾아간 중역들에게 정 회장은 뜬금없이 "금년 여름에는 소떼 몰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나 한번 들어가 볼란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여러 중역들은 서로 간에 낯색을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렇다 할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자리는 일단 그렇게 우물우물 넘어 갔는데 회장께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중역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쑤군거렸다.
"이거, 일 났구먼. 왕 회장께서 드디어…"
"머리가…. 뇌 혈관이…"
이것이 평상시 매우 매우 합리적이고 머리 좋답신 ''먹물'' 중역들의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응당, 당연히 그랬을 것이었다.
그러나 몇달 뒤, ''왕회장'' 뜻대로 일은 이뤄졌다.
그렇게 50년, 반세기만에 그이는 남북의 첫 물꼬를 뚫어냈고, 뒤이어 고향이 이북인 필자도 곧장 9박10일간 북한을 다녀왔다.
"평생 동안 꼭두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그 날 할 일이 즐거워져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기 때문"이라고 그이는 더러 말하기도 하였다지만, 그거야 어디 그이였을 뿐인가.
60년대, 70년대, 80년대 이 나라 집집의 지아비 가장(家長)들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현관에서 구두끈을 매면서 하나같이 하루하루,제 처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 천하없어도 해내야 할 그 날 몫의 일을 어금니를 물면서 확인들을 했던 것이다.
그 맨 선두에 바로 정주영이라는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
아산(峨山)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타계 소식을 접하면서 그이가 이 나라에 남긴 두가지 족적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50여년 전의 6.25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농업국가를 불과 40여년만에 세계 10위권의 신흥 공업국가로 탈바꿈시켜 놓은 몇 안되는 주역 중의 한 사람이 그이라는 것.
게다가 학력은 겨우 시골의 ''보통학교'' 졸업이 전부이다.
둘째는 3년 전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소 1천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가 50년 동안 꽝꽝 닫혀 있던 남북한의 물꼬를 처음으로 뚫어 냈다는 것….
그렇게 별별 희한한 일화들이 영국의 아동 교과서에 게재되었을 정도로 수다한 신화들을 남겨 놓았다는 점.
이상의 두 가지 족적만도 엄청난 것이다.
하지만, 70년대와 80년대에 재야 운동으로 두어번 감옥에까지 들락거리고 육군본부에서 군사재판까지 받았던 필자 같은 사람에게 가장 큰 감회로 새삼 다가온 것은 다름이 아니다.
오로지 그이만이 그렇게 온 몸으로 해낼 수 있었던, 당시 천편일률적이고 진부하게 겉돌던 재야권에의 신선한 직격탄이었다.
야아 저 봐라, 저 봐라, 저게 대체 뭔고?
뭐라는 것인고?!
문익환 목사나 임수경양과는 전혀 만나는 양태가 다르지 않나.
저게 대체 뭔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그이다운 그 날카로운 직관과 순발력이 일궈낸 우리 사회 ''지식인 세계''에의 엄청난 충격과 지적(知的) 패러다임 변화야말로 몇마디 말로 계량할 수 있는 것이 애초에 아니었다.
진보? 보수?
그런 따위 곳곳에서 잘난 척하던 무거운 어휘들이 그이의 그 행적 앞에서는 일거에, 하루 아침에 빛 바랜 허수아비로 떨어지던 것이다.
모름지기 현실적으로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일이란 바로 저런 것임을 절감케 해 주던 것이었다.
지난 70년대 한 때 사회일각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였던 경부고속도로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현대 정주영 사장의 합작품이라는 소리까지 있지 않던가.
그렇게 이 나라 경제의 첫 초석이 놓였던 것이었다.
필자는 98년 여름 그이가 소 몰고 판문점을 넘었을 때도 그 현장 취재차 판문점까지 가 본 일이 있거니와 그 때도 현대측 임원 한사람에게서 다음과 같은 기이한 이야기 한 토막을 들었다.
그 해 초에 신년 하례차 댁으로 찾아간 중역들에게 정 회장은 뜬금없이 "금년 여름에는 소떼 몰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나 한번 들어가 볼란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여러 중역들은 서로 간에 낯색을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렇다 할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자리는 일단 그렇게 우물우물 넘어 갔는데 회장께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중역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쑤군거렸다.
"이거, 일 났구먼. 왕 회장께서 드디어…"
"머리가…. 뇌 혈관이…"
이것이 평상시 매우 매우 합리적이고 머리 좋답신 ''먹물'' 중역들의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응당, 당연히 그랬을 것이었다.
그러나 몇달 뒤, ''왕회장'' 뜻대로 일은 이뤄졌다.
그렇게 50년, 반세기만에 그이는 남북의 첫 물꼬를 뚫어냈고, 뒤이어 고향이 이북인 필자도 곧장 9박10일간 북한을 다녀왔다.
"평생 동안 꼭두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그 날 할 일이 즐거워져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기 때문"이라고 그이는 더러 말하기도 하였다지만, 그거야 어디 그이였을 뿐인가.
60년대, 70년대, 80년대 이 나라 집집의 지아비 가장(家長)들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현관에서 구두끈을 매면서 하나같이 하루하루,제 처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 천하없어도 해내야 할 그 날 몫의 일을 어금니를 물면서 확인들을 했던 것이다.
그 맨 선두에 바로 정주영이라는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