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여신상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미국 뉴욕시 맨해튼 가장 남쪽끝에 있는 배터리파크플라자 빌딩.맞은 편엔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황소상이 버티고 있다.

이 빌딩이 바로 1백3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월스트리트의 터주대감 로펌 휴즈 허바드 & 리이드의 근거지이다.

니체를 꿈꾸던 철학도 남일우 변호사(62)가 일하는 곳이기도 하다.

남 변호사는 이 로펌의 파트너중에서도 내부적으로 수석(Senior)파트너로 불린다.

3백명이 넘는 변호사중 수석파트너는 손가락안에 들 정도.파트너로서 갖고있는 지분도 그만큼 많다.

미국 로펌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한국인 변호사중에서 가장 극진한 대접을 받는 고위직에 있는 셈이다.

남 변호사의 이력서엔 한국과 미국의 최고 엘리트양성 코스들로 꽉 차있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좀 흥미롭다.

57년 경기고등학교를 1년만에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15회)에 들어간다.

대학시절 법보다는 "윤리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졸업후 문리대 철학과로 편입해 다시 대학을 졸업하고 ROTC(1기)로 군복무를 마친 뒤 유학길에 오른다.

전공은 물론 철학.브라운대학을 거쳐 미국에서 철학으로 가장 권위있는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시카고의 일리노이주립대학에서 9년간 철학교수 생활을 한다.

하지만 분석철학이 주류인 미국 철학계는 "윤리적"인 문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변호사들이 더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대를 졸업한지 18년만에 철학을 접고 다시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다.

이때가 불혹인 나이 40.미국인들에게 조금이라도 질 수 없다는 자존심으로 악착같이 공부했고 그덕에 깁슨 던&크러쳐,데비보와스&플림프턴,윌키 파&갤러퍼등 내로라하는 로펌에서만 변호사생활을 했다.

이제 그는 뉴욕 로펌사회에서는 모두 알아주는 기업 구조조정의 달인이다.

기업을 구조조정한다는 것은 인수합병(M&A)은 물론 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금융이나 소송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구조조정변호사는 한 부문을 치료하는 전문병원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황의 환자라도 진단과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종합병원의 성격이 더 크다.

그만큼 일도 많이 해야 한다.

사무실에서 차로 한시간반 가량 걸리던 곳에 살던 그는 출퇴근시간이 아까와 최근 사무실 바로 옆에 조그만 아파트를 구했을 정도다.

그런 남 변호사의 관심사는 몇해전부터 "한국"이다.

지금 맡고 있는 일도 한국비즈니스 총책임.한국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구조조정과 관련해 할일이 많아진 탓이기도 하지만 36년동안 미국에 살면서 미국 사람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정도로 갈고 닦은 실력을 이젠 조국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한국관련 업무를 할때 미국측 입장이 아닌 한국기업이나 기관을 대표해서 일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는 그래서 그동안 했던 일중 가장 보람있었던 일로 지난 98년 한국자산관리공사와 함께 만든 특별채권 국제입찰을 꼽는다.

IMF 경제위기이후 너무 경황이 없던 나머지 대부분의 한국관련 딜이 외국기업에서 주도권을 잡고 결정했던게 사실.그러나 부실채권 매각차원에서 이뤄진 이 특별채권은 한국쪽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 제값을 받고 외국에 판 첫 케이스였다.

이 방식은 이후 한국에서 부실채권을 해외에 파는 교과서가 되기도 했다.

남 변호사의 실력은 뉴욕 로펌사회에선 이미 정평이 나있다.

미국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왔던 로스 페로가 지난 85년 자신의 회사인 EDS를 GM에 20억달러를 주고 매각할 때였다.

GM은 로스 페로에게 매입대금으로 GM의 주식을 주면서 배당은 EDS의 이익으로 한다는 것을 제시했다.

회사이름의 첫 글자를 딴 이른바 E-주식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주식발행이었다.

이 작업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남변호사.나중에 이런 사례가 많아지면서 "알파벳-주식"은 이제 고유명사가 됐을 정도다.

지난 88년 AHP라는 제약회사가 피임약을 잘못 만들어 파산지경에 처한 로빈사를 인수하는 50억달러짜리의 대형 거래는 남 변호사가 작성한 1백30여쪽의 보고서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진행되기도 했다.

16억달러 규모였던 LG전자와 필립스의 합작등 한국기업의 대형거래가 상당수 그의 손을 거쳤음은 물론이다.

최근 한국업무가 늘어나면서 서울출장이 많아진 그는 "한국사람이 미국 사람들을 너무 많이 믿고 너무 쉽게 양보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여러가지가 많이 발달한 미국은 기업간의 거래에서도 세련되게 사기치는 기법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는 남 변호사는 "좀더 냉정하고 차분하게 거래를 할 경우 우리 정부나 기업이 더 많은 기회를 누리고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뉴욕=육동인 특파원 dong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