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오죽헌에 6백년 된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율곡매''로 불리는 이 나무 곁으로 봄마다 이이(李珥)의 시심을 되새기려는 사람들이 찾아든다.

''매화 본성이 하 정결터니/달빛 어리어 물인 듯하이/눈서리 흰 살결 고움을 도와/맑고 싸늘함이 뼈에 시리다/너를 대해 내 맘을 씻나니/오늘밤은 앙금 하나 없구나''(이이)

퇴계 이황(李滉)은 안동 도산서원 뜰에 매화를 심어놓고 꽃이 필 때면 달이 이울도록 곁에 머물며 아름다운 정을 나눴다.

병이 들자 그는 깨끗하지 못한 모습을 ''매형(梅兄)''에게 보일 수 없다 하여 매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했다.

유언도 화분에 물을 잘 주라는 한마디였다.

사군자(梅蘭菊竹) 중에서도 으뜸인 매화.

매화는 지조와 품격의 상징으로 선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만큼 매화를 읊은 시와 그림도 많았다.

재야 한문학자 손종섭(83)씨가 엮은 ''내 가슴에 매화 한 그루 심어놓고''(학고재)에는 매화를 주제로 한 선인들의 시·시조 1백40편과 산문 7편이 담겨있다.

매화전문가 안형재씨의 사진과 그윽한 옛그림까지 곁들여져 시화(詩畵)의 묘미를 한껏 느낄 수 있다.

고려 유신 이색(李穡)이 옛 동지들을 그리며 매화를 찾다가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석양에 호올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하고 되뇌이던 구절도 애닯게 읽힌다.

매화는 스스로를 닦는 수양의 본보기이자 맑은 여인,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매형 성품이 스스로 맑아/비낀 달빛을 되비춰주네/서로 보아 둘 다 사특함이 없으니/시경 삼백 편에 맞먹을 만하구나!''(이행)

''남국의 예쁜 여인 옥설 같은 흰 살결에/엶은 화장 얇은 소매 걸음도 나릿나릿/이 밤사 창 앞에 와서 한번 살짝 웃는고''(이산해)

모든 꽃들이 따뜻한 철에 피어 벌 나비와 더불어 춤추는데 매화는 하필 칼바람과 얼음을 뚫고 추울 때 홀로 핀다.

그래서 향기도 청향(淸香)이라 하고 색깔도 천연백(天然白)이라고 일컫는다.

섬진강 매화 잔치가 절정인 요즘,매향과 시흥에 함께 취하고 싶다면 이 책을 배낭에 꼭 챙겨갈 일이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