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권리 쟁취가 능사 아니다 ..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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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에 우리사회가 체감하고 있는 특징이라면, 의무나 책임보다 권리의 개념이 폭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재산권 환경권 행복추구권 국정감사권을 말할지언정, 누구도 납세 의무나 교통법규를 지킬 의무, 병역 의무를 말하지 않는다.
권리의 폭주현상은 그동안 우리가 권리의 개념에 굶주려 왔기 때문일것이다.
노동3권 자유권 정부비판의 권리 및 소비자의 권리 등은 권위주의시대에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권리만능의 시대로서, 시민권 정치권 사회권 등의 개념이 스스럼없이 통용된다.
홉스의 시대는 자기보존권, 로크의 시대는 생명권 자유권 재산권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이젠 하루가 멀다하고 이름도 생소한 학습권 일조권 소액주주권 등이 쏟아져 나온다.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의무의 사회보다 권리의 사회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
권리의 개념에만 초점을 맞출 뿐, 그 권리를 어떻게 행사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리의 개념과 권리사용의 문제는 별개다.
때때로 우리는 특정 낱말의 뜻을 몰라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낱말 풀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낱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해도 문제의 낱말이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야단법석''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야외에서 베풀어지는 법회''라고 풀이돼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맥락에서 어떻게 소란스러운 행동으로 투영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다.
권리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개인에게 있어서 어떤 권리가 있다는 것과 그 권리를 어떻게 행사하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문제는 다르다.
누구나 휴대폰을 소유하고 이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권리가 있다고 해서 도서관이나 음악회에서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혹은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렸다고 하여 모두 봄처녀 소식을 휴대폰으로 알리고자 한다면 통화량이 급증해 누구도 통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린다.
정치.사회적 권리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노조원들이 파업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해서 회사가 부도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인상을 빌미로 집단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혹은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다고 하여 빈자리가 났을 때 옆에 서있는 할아버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 앉는 젊은이의 경우, 타당한 행동은 아니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개인에게 어떠한 권리가 있는가 하는 점에 민감한 관심을 보여왔다.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는 적극적 권리까지 인정할 수 있는지도 쟁점이었다.
그러나 개인에게 일정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권리를 언제 어디서나 마음놓고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권리인정과 권리행사와는 엄연히 구분돼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 권리의 소유와 권리의 행사를 구분하지 못해 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사립학교의 분규를 보자.
사학재단이 인사권과 재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조자룡의 헌칼''을 휘두르는 상황처럼, 그 권리를 무분별하게 휘둘러서는 곤란하다.
무분별한 권리의 사용은 결국 권리의 존재이유까지 무색한 것으로 만들게 마련이다.
혹은 성인이 행복추구권을 갖고 있다고 하여 원조교제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정치인이 정치헌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하여 이해관계가 걸린 기업인들로부터 정치헌금을 받는건 부당한 일이다.
데모할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하여 화염병을 던질 수 있는 권리까지 행사할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확실히 우리사회는 ''권리만능의 사회''가 됐다.
그 결과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세종로 정부청사, 서울의 주요도심에서는 연일 권리를 부르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권리의 쟁취만이 능사가 아니다.
권리의 쟁취 못지않게 권리의 사용에는 현명한 판단력과 분별력이 요구된다.
권리의 소유와 권리의 적절한 행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사회에서의 삶의 질은 개선되기보다는 악화될 것이다.
parkp@snu.ac.kr
오늘날 재산권 환경권 행복추구권 국정감사권을 말할지언정, 누구도 납세 의무나 교통법규를 지킬 의무, 병역 의무를 말하지 않는다.
권리의 폭주현상은 그동안 우리가 권리의 개념에 굶주려 왔기 때문일것이다.
노동3권 자유권 정부비판의 권리 및 소비자의 권리 등은 권위주의시대에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권리만능의 시대로서, 시민권 정치권 사회권 등의 개념이 스스럼없이 통용된다.
홉스의 시대는 자기보존권, 로크의 시대는 생명권 자유권 재산권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이젠 하루가 멀다하고 이름도 생소한 학습권 일조권 소액주주권 등이 쏟아져 나온다.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의무의 사회보다 권리의 사회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
권리의 개념에만 초점을 맞출 뿐, 그 권리를 어떻게 행사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리의 개념과 권리사용의 문제는 별개다.
때때로 우리는 특정 낱말의 뜻을 몰라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낱말 풀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낱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해도 문제의 낱말이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야단법석''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야외에서 베풀어지는 법회''라고 풀이돼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맥락에서 어떻게 소란스러운 행동으로 투영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다.
권리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개인에게 있어서 어떤 권리가 있다는 것과 그 권리를 어떻게 행사하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문제는 다르다.
누구나 휴대폰을 소유하고 이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권리가 있다고 해서 도서관이나 음악회에서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혹은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렸다고 하여 모두 봄처녀 소식을 휴대폰으로 알리고자 한다면 통화량이 급증해 누구도 통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린다.
정치.사회적 권리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노조원들이 파업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해서 회사가 부도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인상을 빌미로 집단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혹은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다고 하여 빈자리가 났을 때 옆에 서있는 할아버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 앉는 젊은이의 경우, 타당한 행동은 아니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개인에게 어떠한 권리가 있는가 하는 점에 민감한 관심을 보여왔다.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는 적극적 권리까지 인정할 수 있는지도 쟁점이었다.
그러나 개인에게 일정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권리를 언제 어디서나 마음놓고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권리인정과 권리행사와는 엄연히 구분돼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 권리의 소유와 권리의 행사를 구분하지 못해 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사립학교의 분규를 보자.
사학재단이 인사권과 재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조자룡의 헌칼''을 휘두르는 상황처럼, 그 권리를 무분별하게 휘둘러서는 곤란하다.
무분별한 권리의 사용은 결국 권리의 존재이유까지 무색한 것으로 만들게 마련이다.
혹은 성인이 행복추구권을 갖고 있다고 하여 원조교제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정치인이 정치헌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하여 이해관계가 걸린 기업인들로부터 정치헌금을 받는건 부당한 일이다.
데모할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하여 화염병을 던질 수 있는 권리까지 행사할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확실히 우리사회는 ''권리만능의 사회''가 됐다.
그 결과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세종로 정부청사, 서울의 주요도심에서는 연일 권리를 부르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권리의 쟁취만이 능사가 아니다.
권리의 쟁취 못지않게 권리의 사용에는 현명한 판단력과 분별력이 요구된다.
권리의 소유와 권리의 적절한 행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사회에서의 삶의 질은 개선되기보다는 악화될 것이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