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이이화(64.전 역사문제연구소장)씨는 요즘 모처럼 "휴식중"이다.

한국사 5천년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생활사 중심으로 풀어낸 통사 "한국사 이야기"의 조선후기편(13~15권,한길사)을 최근 내놓고 가져보는 "여우볕"같은 휴식이다.

물론 그동안 미뤄왔던 원고를 쓰고 강연,인터뷰 요청 등에 응하느라 마냥 쉬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이런 휴식도 이젠 끝나 간다.

4월부터는 19세기 이후 "한국사 이야기"의 후속집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책은 너무 어렵고 딱딱해요.중학교 3학년인 제 딸아이는 국사와 한문 점수가 제일 낮은데 책이 너무 어렵고 딱딱해서 그래요.공부하고 싶은 동기를 유발하지 못하거든요"

이씨는 자신이 ''한국사 이야기''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95년 7월부터 책을 쓰고 있는 그는 오는 2003년까지 총 22∼23권으로 이를 마무리할 계획.

당초 예정보다 1∼2권 분량이 준 것이지만 한 개인이 쓰는 통사로는 최대의 저작이다.

이를 위해 그는 매일 밤 11시부터 오전 7시까지 ''올빼미 작업''을 통해,그것도 검지로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독수리 타법''으로 월평균 2백자 원고지 4백장 정도를 써낸다.

"대중들이 역사와 친해지도록 하려면 ''쉽고 재미있고 의미있는'' 역사책을 만들어야 합니다.재미만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재미없는 책을 누가 보겠습니까"

''한국사 이야기''에 가급적 한자나 한문을 쓰지 않고 그림과 사진을 풍부하게 곁들인 점,정치사나 왕조사 중심에서 벗어나 생활사 중심으로 서술한 것 등은 이런 이유에서다.

제목이나 설명도 구어체에 가깝다.

역사기술에 대한 그의 생각은 역사에 대한 인식,곧 사관에서 비롯된다.

그는 식민사관에 대해 민족자존을 중시하는 자주사학을,지배자 중심의 근대사학 대신 민중사학을,정치사 중심의 역사 대신 생활·풍속사 중심의 역사를 추구해왔다.

그가 일찌감치 역사대중화 작업에 나선 것도 이런 생각에서였다.

그는 지난 86년부터 한길사의 역사기행 및 역사강좌에 1백여차례나 참여해 역사현장 곳곳에서 대중들과 호흡했다.

역사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소장 사학자들과 함께 답사연구라는 새로운 풍토를 만들기도 했다.

또 동학기념단체를 설립,동학운동의 뜻을 되살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특히 ''이야기 인물한국사(전5권)''''겨레의 역사를 빛낸 사람들(전7권)''''역사풍속기행''등 40여권의 대중적 역사책을 써낸 것은 누구도 따라가기 힘든 업적으로 평가된다.

"역사기술은 합리적·객관적이어야 합니다.역사가 자기의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은 우리가 마땅히 비판해서 바로잡아야 하고 일본측도 깊이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그의 이같은 비판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는 다 잘했고 다른 나라는 무조건 잘못했다는 식의 접근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북한의 단군릉 발굴에 대해서도 "단군의 실존연대를 너무 앞당겨놓은 것은 허황한 주장"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재야·진보 사학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강단으로부터 폄하되고 때론 좌익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이제 그도 이런 평가를 굳이 거부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평등과 개혁의 당위성을 믿는 분단시대의 지식인으로서 민족과 민중,생활사 중심의 역사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그리고 반독재·민주화운동에 동참하면서 권력에 초연한 채 살아왔다는 점에서 재야요 진보라는 설명이다.

"역사학자는 자기의 권위에 집착하기보다 시대적 소명과 사명감,학문의 자유와 진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대학교수라면 정년을 눈앞에 둔 나이지만 이씨는 차고를 개조한 집필실에서 책과 자료더미에 파묻혀 한국의 역사를 풀어낸다.

그는 "내겐 자리나 돈보다 ''사학자 이이화''가 가장 큰 명예요 재산"이라고 했다.

글=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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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화는 누구 ]

이이화씨는 주역사상의 대가인 야산 이달의 넷째아들이다.

대구 출생,광주고 졸업,서라벌예대 중퇴,민족문화추진회 및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근무 등의 경력이 보여주듯 걸어온 길이 꽤나 복잡하다.

10대중반까지 부친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비롯한 한문을 배웠으나 영어,지리 등 신학문을 하고 싶어 열여섯에 가출,고아원을 전전하다 광주고에 진학했다.

고교시절에는 학예부장을 맡아 문학적 기질을 키웠다.

서라벌예대를 중퇴,방황의 세월의 보내기도 했다.

스물여덟에 "불교시보"에 취직,생활이 안정되면서 학문에 눈을 떴다.

신문사 조사부와 민족문화추진회,서울대 규장각,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을 거치며 고전과 역사를 두루 섭렵했다.

이후 한길사 역사기행.역사강좌와 역사문제연구소 강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역사대중화 작업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