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와의 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비판한 것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모함''이니 ''음해''니 하는 표현까지 써가며 불쾌한 심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 총재가 김대중 대통령을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부른 이후 ''제왕적''이란 접두어를 붙인 말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

최근엔 한 야당중진이 이 총재를 ''제왕적 총재''라고 꼬집고 나서서 화제가 됐다.

모두가 ''제왕적''이란 접두어를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실은 역대 대통령중 제2공화국 기간과 박정희 대통령 사후 잠시를 제외하곤 제왕적이지 않았던 대통령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우리나라 대통령제의 성공과 실패를 말해주는 키워드라는 사실이 더욱 흥미롭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미국의 경우보다도 훨씬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을 보장한다.

대통령은 법률안거부권 외에도 법률안발의권을 가지고 있다.

미국식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에게 법률안거부권을 준 것은 정부에 법률안제안권이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그가 이끄는 정부에 법률안제안권이 있다면 거부권을 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건국헌법부터 시종일관 대통령에게 두 가지 권한을 모두 부여했다.

게다가 대통령은 의회다수당 및 국회의장 등을 통해 입법과정을 지배하고, 오히려 법률보다 더 방대한 위임입법을 통해 입법의 실질적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대통령은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에 대해서도 임명권이나 예산편성권 등을 통해 우월적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었다.

반면 국회는 여소야대라는 극히 희귀하고 짧았던 예외상황을 제외하면 대통령을 견제하는데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건국당시부터 면면히 대통령의 강력한 지위를 제도화했던 덕분에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성장도 하고, 비록 지연되긴 했지만 정치까지 발전시키는 보기 드문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은, 심지어 ''물''이란 접두어가 붙었던 대통령조차 하나같이 제왕적이었다.

이 대통령 우월적 정부형태와 그에 걸맞은 제왕적 대통령들은 정치적 이행기에 요구되는 정국의 안정성을 확보해 줌으로써 결과적으로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기여했다.

반면 제왕적 대통령이란 말은 권력독점의 폐단을 말해 주는, 그리하여 대통령중임제 또는 의원내각제 개헌론의 근거로 사용되는 키워드가 돼 버렸다.

제왕적 대통령이 이끄는 제도화된 행정국가가 국가발전의 장애요인이 되기 시작했지만, 대통령의 헌법상 지위와 권한은 그대로 유지됐다.

대통령은 한번도 구조조정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재선의 압력이 없기에 민심을 도외시하고 독선과 오만을 저지르거나 레임덕 현상을 피하려고 무리수를 두게 된다는 단임제의 폐단을 근거로 개헌론이 제기된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과연 국민은 정말 제왕적 대통령을 거부하는 것일까.

제왕적 대통령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제왕적이지 않은 대통령에게 국정을 맡겨 놓고 안심할 수 있겠는가.

설사 중임제 개헌이 성사되거나 제왕적이지 않은 성품을 지닌 분이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얼마 가지 않아 물대통령의 우유부단을 지탄하지 않겠는가.

제왕적 대통령이든, 무능한 정부든 결국 국민의 선택이라 한다면 지나친 결과론일까.

물론 정.부통령제 및 중임제 개헌이 당리당략 차원에서가 아니라,대통령에 대한 최초의 구조조정을 위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시스템을 고치는 일이라면 그 보다 더 절실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좀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정계개편의 의혹을 불러일으키면서 각당의 의원수를 이리 저리 조합해보는 식으로는 안된다.

국민적 합의에 터잡아 추진해야지, 이래 저래 안되니까 해보는 궁리처럼 돼선 안된다.

물론 야당도 ''정계개편의 빌미를 준다''는 의심으로 신경질적으로만 반응할 것이 아니라, 개헌문제에 좀더 진취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개헌의 의제를 차차기를 향한 대안으로 설정하고 충분한 토론을 거쳐 국민적 합의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 정도가 아닐까.

joonh@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