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문화유산 중에는 그것들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 수두룩하다.

첨성대의 용도나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는 전문가들도 아직 확실하게 모른다.

''삼국유사''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지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첨성대를 오늘날의 천문대와 같은 것으로 해석한 사람은 1910년께 일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다.

반세기 이상이 지난뒤 첨성대가 천문관측 구조물로 쓰기에는 너무 불편하고 모양도 이상하다는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용범 교수는 74년 첨성대가 부처를 모시는 불단(수미단)이라는 설을 내놓아 첨성대를 종교적 상징물이라고 주장했다.

뒤이어 중국의 수학서에 나타나는 기하학적 지식을 표현한 것이란 설, 해시계 설, 선덕여왕의 도리천신앙의 상징물이라는 설도 등장했다.

한 때 이설만 낳은채 지금도 ''별을 쳐다보는 대''란 뜻의 이름만으로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남아 있다.

지난 주말 KBS 1TV가 내보낸 역사스페셜 ''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었다''는 신라왕과 귀족들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놀이터로 알려져 오던 포석정이 제사를 지내던 성소였다는 것을 증거를 들어가며 보여줘 관심을 모았다.

경애왕이 한 겨울인 음력 11월에 이곳에 놀러갔다가 살해됐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상식에 어긋나 고려건국의 정당화를 위해 조작된 것이고 실은 호국제사를 지내러 갔었던 것이라는 해석은 사실여부를 떠나 흥미롭다.

중국 일본의 유상곡수풍속을 소개하고 그 기원을 음력 삼월 삼짇날과 7월14일에 상서롭지 못한 것을 물리치기 위해 물가에서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올렸던 ''계사''에서 찾으려 한 것은 탁견이라 하겠다.

하지만 포석정 근처에서 ''포석(鮑石)'' 명문이 있는 와당이 발견됐다 해서 그것이 아직 위서라는 오명을 씻지 못한 ''화랑세기''에 나오는 포석사(鮑石祠)로 단정짓는 일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역사연구에서 사료비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단편기록의 비판과잉은 회의를 몰고올 뿐이다.

첨성대의 경우가 그렇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