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년간 ''개혁''이란 용어만큼 우리를 긴장시키고 피로하게 만든 단어는 없을 것이다.

''앞을 제대로 안보고 한 발짝씩 움직이면 도랑에 빠지게 마련이므로 도랑은 뛰어 넘어야 한다''

''하늘만 쳐다보고 뛰다 보면 도랑에 빠지게 마련이다''

전자는 빅뱅식.총체적 개혁, 후자는 점진적.순차적 개혁의 논리를 대변한다.

러시아와 동유럽 구사회주의 경제를 시장경제체제로 개혁하는데 참여하고 자문했던 사람들은 전자를, 개발도상국의 금융.자본자유화를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하는 학자들은 후자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두가지 대비되는 전략중에서의 선택은 정치 ''지도자''의 몫이다.

현실에 대한 인식과 미래에 대한 비전이 전략선택의 결정요인이다.

경제위기 상황에선 국민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이익집단의 목소리가 자제되기에 빅뱅식 전략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구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붕괴나, IMF 위기 당시의 아시아국가들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한편 이들 국가에서는 정권교체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총체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여건도 구비됐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 점진적 개혁의 대표적 사례다.

OECD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OECD 가입으로 금융.자본자유화가 너무 급속히 이뤄지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OECD는 일단 자유화한 조치는 후퇴하지 않지만(stand-still 원칙), 자유화는 점진적으로 추구한다는(roll-back 원칙) 정신을 바탕으로 규범을 제정했다.

가입 당시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 구사회주의 경제보다 우리가 자본자유화를 더 유보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원칙 때문에 가능했다.

어떠한 전략을 선택하든, 개혁의 성공여부는 추진세력의 전문성과 정치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 경제를 글로벌 환경에 적응시키는 것이 개혁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국제적 식견을 갖춘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개혁이 추진돼야 하며, 경제주체들의 협조를 이끌어 낼 정치적 능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우리는 4대 부문으로 지칭되는 총체적 개혁프로그램을 앞에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점진적이며 순차적인 개혁전략을 취했다고 평가된다.

경제자유화의 충격을 최소화하고 경제주체들간 이해상충을 조화시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개혁의 스피드는 중요한 과제로 제기된다.

스피드가 늦을 경우 개혁 모멘텀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단 개혁의 ''기본 틀''을 구축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위기재발을 방지하는 제반 장치도 구비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우리는 현재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나.

의료개혁 교육개혁 노동개혁 금융개혁 기업개혁 등 ''개혁''이라는 단어가 붙은 곳마다 이해집단의 반발만이 눈에 보이고 있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때문이겠지만, 더 근원적 요인은 각론적 개혁이 시장경제체제의 정착이라는 총론적 원칙과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데 기인한다.

시장의 요체는 경쟁이다.

의료나 교육개혁은 형평을 추구하는 하향평준화, 노동은 온정적 동정, 금융개혁은 관치금융, 기업개혁은 시혜적 처리라는 개념이 특징으로 부각되지 않는가.

일생을 경쟁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사람들이 문제다.

특히 대외개방에 직면하지 않은 부문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진정한 경쟁을 했다고 볼 수 없다.

케인스의 말대로 이미 죽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낡은 사고에 본인이 물들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이들이 개혁세력의 축을 이루고 있기에 이러한 문제들이 자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기부양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장기적 경기침체는 성장잠재력을 훼손하기에 방치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경기 하강조짐이 보인다고 해서, 그것도 뚜렷한 거시경제정책의 잘못이 지적되지도 않으면서, 또 개방경제에서 거시정책의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러한 주장이 대두되는 것은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고, 더 이상 ''개혁''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자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냉소적인 의견일까.

개혁이 주춤하면서 제기되는 경기부양론을 국제시장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chskim@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