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서울 양천구 목동의 방송회관은 3층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날은 TV홈쇼핑 신규 사업자 심사의 하이라이트인 "청문회" 날이었기 때문.

사업신청서를 내민 6개 업체 사장들은 한사람도 예외없이 14명의 심사위원들 앞에서 혼쭐이 났다.

예상을 벗어난 곤혹스런 질문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현대백화점 이병규 사장도 심사위원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질문이 날아왔다.

"홈쇼핑사업의 본질은 유통업인데 업계에 몸 담은지 3년밖에 안된 사람이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그가 대답했다.

"새로운 사업은 아이디어와 노력에 좌우되는 것이지 경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그는 또 "내가 사장을 맡은 99년과 지난해 두해동안 현대백화점은 창사이래 최대 매출과 이익을 올렸다"고 말했다.

4일 뒤인 31일 오전 11시 결과가 나왔다.

새로 뽑힌 3개 사업자중 유일한 대기업이었다.

이 사장의 뚝심과 역량이 입증된 순간이었다.

현대백화점은 TV홈쇼핑 사업을 따냄으로써 한단계 껑충 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도약의 계기를 잡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사장이 이 사업에 부여하는 의미는 도약 정도가 아니다.

그는 이를 "생존"으로 표현한다.

단순한 사업확장 정도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변화"다.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는 기업의 생명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

유통시장이 대표적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선 전자상거래를 포함한 온라인 시장이 빅뱅을 예고하고 있다.

방송이나 IT(정보기술)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는게 이런 예측을 뒷받침한다.

소비자들도 변하고 있다.

기업과 동시에 정보를 얻고 소비자주권을 부르짖고 있다.

유통시장이 변하고 한 축인 소비자가 변하고 있다.

다른 한 축인 유통기업이 변화에 뒤처지면 곧바로 도태된다는 논리다.

그는 백화점 사업이 사양산업이란 주장에는 펄쩍 뛴다.

이미 성숙기에 접어들어 침체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얘기에도 고개를 내젓는다.

이 사장은 우리나라 백화점 시장이 성장기에 들어섰다고 생각하고 있다.

성장산업이란 것이다.

첫번째 이유로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골고루 마련해줄 사회적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다는 것을 꼽는다.

경제권을 쥔 주부들은 대낮에 쇼핑할 수 있는 짬이 난다는 얘기다.

맞벌이가 일상화된 미국 일본에서 보기 힘든 현상이다.

상품을 매입하는 시스템이 선진국 백화점과 다르다는게 두번째 이유다.

백화점이 생활문화 공간이 된 것도 한국만의 특수성.

이런 이유들이 겹쳐 우리나라 백화점들은 꾸준히 성장할 것이란 논리다.

짧은 기간에 그는 백화점 사업의 핵심을 파악했다.

이 바닥에 얼마나 몸담았는가를 사람 평가의 잣대로 치는 업계 관행을 뒤집었다.

백화점 업계 "초보 사장"인 그는 바깥에선 유명 인사로 통한다.

마당발에다 정치판도 거쳤다.

특히 작고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는 따로 떼어 생각키 어렵다.

정확하게 대학 졸업을 두달 앞둔 1976년 12월부터 왕 회장을 모시기 시작, 91년말까지만 15년을 비서실에서 일했다.

특이한 경력이다.

그에게 있어 왕 회장은 "인생의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이런 인연으로 도피생활도 해야 했다.

옥고도 치렀다.

93년 시작된 1년9개월간의 도피생활은 그에게 오히려 인생의 보약이 됐다.

이 사장은 98년 3월 또 하나의 전기를 맞았다.

현대백화점 대표이사 부사장을 맡게 된 것.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디딘 셈이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유통업은 매일 매일 승부하는 시합"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눈을 떴다.

노력한 만큼 행운도 따랐다.

사장을 맡은 99년과 2000년 매출액과 이익이 회사 생긴 이래 최대를 기록했다.

올해는 자산총액 기준 30대 기업집단에 새로 들어갔다.

"현대백화점 그룹"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자산총액 2조9천억원, 계열사수 15개로 순위는 26위.

덩치가 커진 만큼 짐도 더 무거워졌다.

그는 요즘 매장을 돌아보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같은 점포, 같은 매장을 둘러봐도 날마다 느낌이 다르다.

손님을 대하는 판매사원들의 태도가 똑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 판매사원을 백화점 가족으로 만드는게 그에겐 큰 부담이다.

판매사원은 백화점 소속 사원이 아닌 까닭이다.

이들은 상품을 만든 제조업체(협력업체) 소속이다.

거래관계를 혈연관계로 끌어올린다는게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그래도 그는 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고객을 감동시키는건 현장에 있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협력업체 대상 설문조사에서 "함께 일하고 싶은 백화점"으로 현대가 첫손에 꼽힌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이 사장의 머리 속은 온통 "고객감동"이란 단어로 채워져 있다.

유통 전문기업이 내세울 것은 이것 하나뿐이기 때문.

그가 현대백화점을 "아시아의 노드스트롬"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강창동 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