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스토리] 정욱 <대원C&A홀딩스 사장>..'한국의 디즈니'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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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C&A홀딩스의 정욱(56)사장 사무실은 사장실 같지가 않다.
영락없는 캐릭터 상점이다.
포켓몬스터를 비롯해 각종 캐릭터를 응용한 문구 장난감 의류 만화책 등이 즐비하다.
40여년간 애니메이션 외길을 걸어온 그는 요즘도 이따금 새벽까지 만화책을 읽는다.
전화를 할 때 그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틈날 때마다 만화를 그리는 게 버릇이 된 것. 그에게는 국내 최다 창작 애니메이션 제작자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닌다.
"독고탁" 등 극장용만 10편을 제작하는 등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의 산증인이기 때문. 애니메이션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64년.강릉고를 졸업한뒤 신동헌 화백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국내 첫 극장용 애니메이션인 홍길동의 제작에 참여했다.
창업을 결심한 것은 선진국과의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선 선진업체와 제휴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에서였다.
1973년 원프로덕션을 차리고 일본 도에이애니메이션에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공급했다.
1977년 대원동화란 법인으로 전환한 그는 하청제작과 극장용 창작을 병행했다.
1982년 "버뮤다"는 이 회사의 첫 창작 애니메이션.하지만 8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물이 들어오면서 국산 애니메이션의 설 곳이 좁아졌다.
1987년 국내 첫 TV용 창작애니메이션 "떠돌이 까치"를 제작하게 된 배경이다.
TV시리즈물 역시 국산 애니메이션 최다 제작기록을 보유할 만큼 활발한 창작을 했다.
"하청받아 번 돈으로 창작을 한 겁니다. 모두들 그랬지요"
정 사장은 한국의 애니메이션 업계가 하청에만 매달렸다는 주변의 시선이 못마땅하기만하다.
오히려 국내시장 규모에 비해 창작을 많이 했다는 게 그의 설명.창작에 나섰던 많은 회사가 문을 닫았다.
"애니메이션은 영화에 비해 투자비가 많이 들고 3년은 걸려야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 업계는 1년중 하청물량이 없는 3~4개월 동안만 창작에 매달렸다.
경쟁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정 사장은 1999년 창작 애니메이션 사업을 접는 중대 결단을 내렸다.
제작비의 3분의 1 수준인 TV 방영권료에 외환위기까지 겹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캐릭터 라이센스에 승부를 걸었습니다"그는 사업을 구조조정했다.
1999년 7월 일본의 포겟몬스터를 들여다 국내에 공급했다.
결과는 대 히트.이를 시작으로 국내외 캐릭터를 문구 완구 등에 공급해 수익을 올렸다.
지난해는 60여명의 직원이 1백9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직원이 2백50명에 달했던 1996년 매출은 70억원이었던 것에 비해 커다란 변화다.
이 회사의 새로운 수익원천이 된 캐릭터는 국산이 10개,외국산이 30개.한때 연간 80편에 이른 하청물량은 1~2편으로 줄었다.
고수익 사업구조로 바뀐 것. 정 사장은 지난해 창작 애니메이션 사업을 재개했다.
결국은 그가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해외업체와 제휴를 맺었다.
세계시장에서 팔려야 투자를 회수할 수 있다는 걸 체험해서였다.
제작도 기술력있는 업체와 제휴하는 방식으로 전개했다.
씨네픽스가 제작하는 3차원 애니메이션인 큐빅스에 자본을 대고 캐릭터 라이센스와 마케팅을 맡았다.
미국의 포키즈엔터테인먼트와는 라이센스 수익을 나눠갖기로 하고 손을 잡았다.
"일본 지브리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인 원령공주는 일본에서만 1천4백만명을 동원했습니다" 정 사장은 한국내 시장에서 디즈니와 당당히 맞붙어 보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오광진 기자 kjoh@hankyung.com
영락없는 캐릭터 상점이다.
포켓몬스터를 비롯해 각종 캐릭터를 응용한 문구 장난감 의류 만화책 등이 즐비하다.
40여년간 애니메이션 외길을 걸어온 그는 요즘도 이따금 새벽까지 만화책을 읽는다.
전화를 할 때 그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틈날 때마다 만화를 그리는 게 버릇이 된 것. 그에게는 국내 최다 창작 애니메이션 제작자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닌다.
"독고탁" 등 극장용만 10편을 제작하는 등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의 산증인이기 때문. 애니메이션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64년.강릉고를 졸업한뒤 신동헌 화백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국내 첫 극장용 애니메이션인 홍길동의 제작에 참여했다.
창업을 결심한 것은 선진국과의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선 선진업체와 제휴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에서였다.
1973년 원프로덕션을 차리고 일본 도에이애니메이션에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공급했다.
1977년 대원동화란 법인으로 전환한 그는 하청제작과 극장용 창작을 병행했다.
1982년 "버뮤다"는 이 회사의 첫 창작 애니메이션.하지만 8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물이 들어오면서 국산 애니메이션의 설 곳이 좁아졌다.
1987년 국내 첫 TV용 창작애니메이션 "떠돌이 까치"를 제작하게 된 배경이다.
TV시리즈물 역시 국산 애니메이션 최다 제작기록을 보유할 만큼 활발한 창작을 했다.
"하청받아 번 돈으로 창작을 한 겁니다. 모두들 그랬지요"
정 사장은 한국의 애니메이션 업계가 하청에만 매달렸다는 주변의 시선이 못마땅하기만하다.
오히려 국내시장 규모에 비해 창작을 많이 했다는 게 그의 설명.창작에 나섰던 많은 회사가 문을 닫았다.
"애니메이션은 영화에 비해 투자비가 많이 들고 3년은 걸려야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 업계는 1년중 하청물량이 없는 3~4개월 동안만 창작에 매달렸다.
경쟁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정 사장은 1999년 창작 애니메이션 사업을 접는 중대 결단을 내렸다.
제작비의 3분의 1 수준인 TV 방영권료에 외환위기까지 겹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캐릭터 라이센스에 승부를 걸었습니다"그는 사업을 구조조정했다.
1999년 7월 일본의 포겟몬스터를 들여다 국내에 공급했다.
결과는 대 히트.이를 시작으로 국내외 캐릭터를 문구 완구 등에 공급해 수익을 올렸다.
지난해는 60여명의 직원이 1백9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직원이 2백50명에 달했던 1996년 매출은 70억원이었던 것에 비해 커다란 변화다.
이 회사의 새로운 수익원천이 된 캐릭터는 국산이 10개,외국산이 30개.한때 연간 80편에 이른 하청물량은 1~2편으로 줄었다.
고수익 사업구조로 바뀐 것. 정 사장은 지난해 창작 애니메이션 사업을 재개했다.
결국은 그가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해외업체와 제휴를 맺었다.
세계시장에서 팔려야 투자를 회수할 수 있다는 걸 체험해서였다.
제작도 기술력있는 업체와 제휴하는 방식으로 전개했다.
씨네픽스가 제작하는 3차원 애니메이션인 큐빅스에 자본을 대고 캐릭터 라이센스와 마케팅을 맡았다.
미국의 포키즈엔터테인먼트와는 라이센스 수익을 나눠갖기로 하고 손을 잡았다.
"일본 지브리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인 원령공주는 일본에서만 1천4백만명을 동원했습니다" 정 사장은 한국내 시장에서 디즈니와 당당히 맞붙어 보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오광진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