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남을 인정하는 사회 ..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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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생활을 하다보면 짜증이 날 때가 하루에도 수십번은 된다.
보도를 걷노라면 갑자기 뒤에서 달려오는 오토바이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기 일쑤다.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다니는 사람 곁을 지날 때면 행여 담뱃재와 불똥이 튀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울려대는 경적소리, 지하철안에서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신고하라''고 수없이 반복해 들려주는 국정원의 안내방송 등은 모두 고요함을 깨뜨리는 소음이다.
어찌 그뿐이랴.
시내버스 운전기사는 라디오 볼륨을 크게 틀어놓아 듣기 싫어하는 사람조차 강제로 듣게 만든다.
아파트에서는 끊임없이 소음을 일으키는 위층 사람들이 아래층 사람들에게 무한한 인내를 강요한다.
이렇게 짜증나는 생활의 주범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래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탓이다.
그렇지만 보다 깊숙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이유를 캐볼 수 있지 않을까.
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것일까.
그것은 남도 나와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라디오를 듣고 싶으면 남도 라디오를 듣고 싶으리라고 단정한다.
내가 더우면 남도 더울 것이라 짐작하고 창문을 열어 젖힌다.
또 안내판을 만들 때 남도 나처럼 길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해 부실한 안내판을 만든다.
이쯤 되면 ''우리가 남이가''하는 구호가 왜 설득력 있게 들리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혹은 ''너와 나는 하나''고 ''너와 내가 따로 없다''는 공동체주의적 발상의 위력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남이 나와 같다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것은 진부하지만,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인 까닭이다.
너는 나와는 다른 선호와 필요, 가치와 신념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너는 너일 뿐, 나의 ''또 다른 나''나 나의 분신은 아니다.
따라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이 싫어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이 좋아할 가능성은 실제적이다.
그것이 바로 개성이며 개별성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가운데 이 엄연한 사실을 잊게 되고, 그 결과 삶의 질은 엉망이 된다.
실상 중.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왕따 현상도 ''너와 나는 같아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발생하는 현상인 셈이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남을 배려하는 사회가 가능하다.
또 나하고 다른 남을 인정할 때 비로소 다원주의가 꽃피고 관용의 정신이 넘치게 된다.
서구에서도 네가 믿는 종교가 내가 믿는 종교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종교전쟁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종교전쟁 이후 비로소 너는 나와는 다른 가치관과 신념을 가질 수 있는 존재며, 이 사실이 존중돼야 한다는 믿음이 자리잡게 됐다.
한국사회는 어떤가.
우리는 유난히도 다양성의 가치를 인정하는데 인색하다.
남을 배려해야 하는 종교인들조차 남이 나와는 다른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지하철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라고 열심히 선교하는 전도사들은 스님에게까지 쫓아가 기독교를 믿을 것을 강권한다.
정치인들은 어떤가.
집권한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특정정책을 추진하면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면 사문난적으로 매도해 버린다.
마치 정치사회가 군대사회라도 되는듯 한 목소리만이 들리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우리 정치사였고 또한 정치 현실이다.
민주화가 된 다음에도 이러한 경향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정부와 목소리가 다르면 반개혁세력, 집단이기주의로 몰릴 판이다.
그러나 너의 가치관과 나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상생의 정치든, 화합의 정치든 가능할 것이다.
우리 공동체주의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그렇지만 남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면서 획일주의와 배타주의, 불관용주의로 흐르게 된 계기로도 작용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남과 나의 공통점 못지않게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이 예절생활의 기본을 세우는 지름길이며, 다원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단초임을 명심하자.
parkp@snu.ac.kr
보도를 걷노라면 갑자기 뒤에서 달려오는 오토바이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기 일쑤다.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다니는 사람 곁을 지날 때면 행여 담뱃재와 불똥이 튀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울려대는 경적소리, 지하철안에서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신고하라''고 수없이 반복해 들려주는 국정원의 안내방송 등은 모두 고요함을 깨뜨리는 소음이다.
어찌 그뿐이랴.
시내버스 운전기사는 라디오 볼륨을 크게 틀어놓아 듣기 싫어하는 사람조차 강제로 듣게 만든다.
아파트에서는 끊임없이 소음을 일으키는 위층 사람들이 아래층 사람들에게 무한한 인내를 강요한다.
이렇게 짜증나는 생활의 주범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래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탓이다.
그렇지만 보다 깊숙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이유를 캐볼 수 있지 않을까.
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것일까.
그것은 남도 나와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라디오를 듣고 싶으면 남도 라디오를 듣고 싶으리라고 단정한다.
내가 더우면 남도 더울 것이라 짐작하고 창문을 열어 젖힌다.
또 안내판을 만들 때 남도 나처럼 길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해 부실한 안내판을 만든다.
이쯤 되면 ''우리가 남이가''하는 구호가 왜 설득력 있게 들리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혹은 ''너와 나는 하나''고 ''너와 내가 따로 없다''는 공동체주의적 발상의 위력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남이 나와 같다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것은 진부하지만,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인 까닭이다.
너는 나와는 다른 선호와 필요, 가치와 신념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너는 너일 뿐, 나의 ''또 다른 나''나 나의 분신은 아니다.
따라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이 싫어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이 좋아할 가능성은 실제적이다.
그것이 바로 개성이며 개별성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가운데 이 엄연한 사실을 잊게 되고, 그 결과 삶의 질은 엉망이 된다.
실상 중.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왕따 현상도 ''너와 나는 같아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발생하는 현상인 셈이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남을 배려하는 사회가 가능하다.
또 나하고 다른 남을 인정할 때 비로소 다원주의가 꽃피고 관용의 정신이 넘치게 된다.
서구에서도 네가 믿는 종교가 내가 믿는 종교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종교전쟁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종교전쟁 이후 비로소 너는 나와는 다른 가치관과 신념을 가질 수 있는 존재며, 이 사실이 존중돼야 한다는 믿음이 자리잡게 됐다.
한국사회는 어떤가.
우리는 유난히도 다양성의 가치를 인정하는데 인색하다.
남을 배려해야 하는 종교인들조차 남이 나와는 다른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지하철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라고 열심히 선교하는 전도사들은 스님에게까지 쫓아가 기독교를 믿을 것을 강권한다.
정치인들은 어떤가.
집권한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특정정책을 추진하면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면 사문난적으로 매도해 버린다.
마치 정치사회가 군대사회라도 되는듯 한 목소리만이 들리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우리 정치사였고 또한 정치 현실이다.
민주화가 된 다음에도 이러한 경향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정부와 목소리가 다르면 반개혁세력, 집단이기주의로 몰릴 판이다.
그러나 너의 가치관과 나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상생의 정치든, 화합의 정치든 가능할 것이다.
우리 공동체주의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그렇지만 남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면서 획일주의와 배타주의, 불관용주의로 흐르게 된 계기로도 작용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남과 나의 공통점 못지않게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이 예절생활의 기본을 세우는 지름길이며, 다원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단초임을 명심하자.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