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 급유차 제조업체인 가나공항의 황선건(43) 대표는 틈만 나면 사무실 집기의 위치를 변경한다.

심지어 장정 6명이 매달려도 진땀을 흘려야 하는 1백20kg짜리 철제 금고까지도 자주 옮긴다.

이같은 "변덕"은 단순한 환경 미화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황 대표는 인생이나 사업에서 변화가 없으면 매너리즘의 늪에 빠질 수 밖에 없다고 믿는 기업인이다.

매너리즘 예방 차원에서 사무실 집기의 위치라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황 대표 자신의 인생에서도 매너리즘이 침투할 틈이 없었다.

현기증 날 정도로 변화무쌍한 인생을 걸어 왔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연극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학생운동에 가담한 그는 79년 과 80년 두 차례 수감 생활을 했다.

출감 후 복학이 힘들자 부산의 다운타운 광복동에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거기서 좌판을 깔아 놓고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문고판 서적을 팔았다.

중학생부터 문학도를 자처했던 그는 비록 좌판 장사였지만 책을 다룬다는게 마냥 즐거웠다.

황 대표는 82년 벽산그룹 공채 1기로 뽑혀 페인트 사업부에서 샐러리맨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직장생활 4년차에 대학에서 날라온 복학통지서를 받아들자 주저없이 학교로 달려갔다.

졸업후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다시 성실한 대기업 샐러리맨으로 돌아와 고속 승진을 보장받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작은 성공을 볼 수 있었던 이때 황 대표는 또 다시 변화를 선택했다.

1991년 가을, 그는 극히 이기적인 인간형으로 흐르기 쉬운 대기업의 조직원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돌연 전남 순천으로 내려갔다.

33세의 늦은 나이에 기술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학교에서는 전교조 운동을 함으로써 윗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기도 했다.

당시 황 대표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지켜 보면서 장학재단을 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돈이 필요했다.

그는 또 주저없이 교단을 내려와 사업에 착수했다.

대우자동차 시절 눈여겨 봐둔 항공기 급유차를 아이템으로 95년 가나공항을 설립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5개국에서만 생산해 오던 기술을 국산화하는데 성공했다.

항공기 급유는 신속하게 대량의 연료를 주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첨단 기술이 필요한 사업이다.

황 대표는 김수영 시인의 "그 방을 생각하며"라는 시를 좋아한다.

특히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다"라는 구절을 자주 되내인다.

그는 방 대신 사무실을 바꾸면서 인생과 경영에서도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김미리 기자 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