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과자 하나도 못 샀다"..박동규 <서울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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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록으로 얼룩진 산비탈 길에 어린이들을 태운 버스행렬이 마치 기차처럼 늘어서 있는 것을 보면서 엉뚱하게 어머니 생각이 났다.
파릇한 연초록 잎새처럼 나에게 저런 싱그러운 시절이 있었던가 하는 마음이 들고,이 마음의 끝에는 나의 어린 시절이 있었고,어린 시절의 틈사이로 문득 문득 구름처럼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섯살 때 나는 경주에서 살았다.
어느 봄날 아버지가 다니던 직장에서 불국사로 야유회를 가기로 해서 온 가족이 함께 가기로 했다.
불국사로 떠나는 날 아침 나는 어머니가 만들어준 하얀 비단 덧신을 신고 있었다.
신발을 사줄 형편이 되지 않았던 어머니는 비단치마를 잘라 덧신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은 포장 안된 소로라서 왕모래가 덮여 있었다.
불국사 경내를 구경하고 석굴암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발바닥이 아파 걸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주저앉았다.
아버지가 내 덧신 바닥을 보았다.
발바닥에서 나온 피가 배어 바닥이 얼룩져 있었다.
"아프다고 하지"하면서 등에 업히라고 했다.
같이 간 이들은 벌써 멀리 사라지고,무거운 나를 업은 아버지와 뒤를 따르는 어머니만 남았다.
어머니가 등을 내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번갈아 다섯살 된 아들을 등에 업고 벚꽃잎이 떨어져 왕모래를 감추고 있는 길을 걸어왔다.
뒤에서 흘러나온 땀이 내 옷을 젖게 하였다.
밤이 깊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연초록 잎새가 피어나는 날이면 기억하게 되는 이 어린날의 조그마한 일은,내가 부모의 땀으로 자랐음을 일깨워 주는 신호등 같은 것이 됐다.
이러한 신호등은 연초록의 어린 시절 어디에도 있다.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와 처음으로 소풍가는 날 새벽이었다.
어머니가 보자기에 도시락을 싸 놓은 것을 몰래 펼쳐 보았다.
마침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과 소풍날이 겹쳐 있었다.
그런데 여동생이 어젯밤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엄마,사이다 두병하고 캐러멜 다섯갑,김밥을 많이 싸 줘야 해요.
사이다 한병은 선생님 드려야 하기 때문이고 캐러멜은 친구 다섯과 나누어 먹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큰오빠라서 여동생처럼 어머니 앞에서 체면없이 무어라고 하기 싫어서 그냥 내방에 들어왔던 것이다.
보자기에는 김밥을 담아 놓은 도시락 밖에 없었다.
그런데 도시락 위에 하얀종이가 있었다.
어머니의 편지였다.
"사랑하는 동규야,과자 하나도 못 샀다.엄마의 마음을 알지,너는 큰 아이지"하고 쓰여 있었다.
나는 얼른 보자기를 다시 싸 놓고 내 방으로 들어와 있다가 "엄마,소풍가요"하고 큰 소리를 쳤다.
집 앞 전차정거장에서 전차에 올라 딱딱한 의자에 앉아 효자동까지 가는 동안 낡은 치마를 입고 내 손을 잡아 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신호등 하나로 사람이 되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성장의 매듭이 되는 삶의 신호등을 어디서 찾게 되는 것일까.
직장에서 물러나면 아버지의 자리도 위협받게 되는 허물어진 가정의 끈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남편의 실직이 가져온 조그마한 생활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자식을 두고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의 당당한 목소리는 그런 세상이라고 치부해야 할 것인가.
오늘도 버스에 아이들이 가득 타고 봄소풍을 가고 있다.
이들이 멀리 설악이나,아니면 어느 명소에 가서 어머니가 써 준 쪽지 한장에 눈앞이 흐려지는 성장의 한 매듭을 느끼고 올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삶의 핵이라는 가정이,그 구성원들이 지닌 자기만의 욕구에 의해서 모래알처럼 부서져 버리는 현실 앞에서 공허한 생명의 존엄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답답하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튼튼한 인간적 유대보다 더 강인한 힘은 없다.
그리고 기업의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의 뜨거운 미래지향적인 행복이 바로 일을 하게 하는 힘이 된다.
그러기에 세상에 나가 가루가 돼도 좋은 삶의 의지를 세워 주는 부모와 나.
나와 자식이라는 가족의 연대를 굳게 이어주어야 할 것이다.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실제적 교육이 바탕이 돼 ''사람이 된 지도자''를 만들어 가야 할 것 아닌가.
pdk@poet.or.kr
파릇한 연초록 잎새처럼 나에게 저런 싱그러운 시절이 있었던가 하는 마음이 들고,이 마음의 끝에는 나의 어린 시절이 있었고,어린 시절의 틈사이로 문득 문득 구름처럼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섯살 때 나는 경주에서 살았다.
어느 봄날 아버지가 다니던 직장에서 불국사로 야유회를 가기로 해서 온 가족이 함께 가기로 했다.
불국사로 떠나는 날 아침 나는 어머니가 만들어준 하얀 비단 덧신을 신고 있었다.
신발을 사줄 형편이 되지 않았던 어머니는 비단치마를 잘라 덧신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은 포장 안된 소로라서 왕모래가 덮여 있었다.
불국사 경내를 구경하고 석굴암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발바닥이 아파 걸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주저앉았다.
아버지가 내 덧신 바닥을 보았다.
발바닥에서 나온 피가 배어 바닥이 얼룩져 있었다.
"아프다고 하지"하면서 등에 업히라고 했다.
같이 간 이들은 벌써 멀리 사라지고,무거운 나를 업은 아버지와 뒤를 따르는 어머니만 남았다.
어머니가 등을 내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번갈아 다섯살 된 아들을 등에 업고 벚꽃잎이 떨어져 왕모래를 감추고 있는 길을 걸어왔다.
뒤에서 흘러나온 땀이 내 옷을 젖게 하였다.
밤이 깊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연초록 잎새가 피어나는 날이면 기억하게 되는 이 어린날의 조그마한 일은,내가 부모의 땀으로 자랐음을 일깨워 주는 신호등 같은 것이 됐다.
이러한 신호등은 연초록의 어린 시절 어디에도 있다.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와 처음으로 소풍가는 날 새벽이었다.
어머니가 보자기에 도시락을 싸 놓은 것을 몰래 펼쳐 보았다.
마침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과 소풍날이 겹쳐 있었다.
그런데 여동생이 어젯밤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엄마,사이다 두병하고 캐러멜 다섯갑,김밥을 많이 싸 줘야 해요.
사이다 한병은 선생님 드려야 하기 때문이고 캐러멜은 친구 다섯과 나누어 먹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큰오빠라서 여동생처럼 어머니 앞에서 체면없이 무어라고 하기 싫어서 그냥 내방에 들어왔던 것이다.
보자기에는 김밥을 담아 놓은 도시락 밖에 없었다.
그런데 도시락 위에 하얀종이가 있었다.
어머니의 편지였다.
"사랑하는 동규야,과자 하나도 못 샀다.엄마의 마음을 알지,너는 큰 아이지"하고 쓰여 있었다.
나는 얼른 보자기를 다시 싸 놓고 내 방으로 들어와 있다가 "엄마,소풍가요"하고 큰 소리를 쳤다.
집 앞 전차정거장에서 전차에 올라 딱딱한 의자에 앉아 효자동까지 가는 동안 낡은 치마를 입고 내 손을 잡아 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신호등 하나로 사람이 되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성장의 매듭이 되는 삶의 신호등을 어디서 찾게 되는 것일까.
직장에서 물러나면 아버지의 자리도 위협받게 되는 허물어진 가정의 끈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남편의 실직이 가져온 조그마한 생활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자식을 두고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의 당당한 목소리는 그런 세상이라고 치부해야 할 것인가.
오늘도 버스에 아이들이 가득 타고 봄소풍을 가고 있다.
이들이 멀리 설악이나,아니면 어느 명소에 가서 어머니가 써 준 쪽지 한장에 눈앞이 흐려지는 성장의 한 매듭을 느끼고 올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삶의 핵이라는 가정이,그 구성원들이 지닌 자기만의 욕구에 의해서 모래알처럼 부서져 버리는 현실 앞에서 공허한 생명의 존엄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답답하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튼튼한 인간적 유대보다 더 강인한 힘은 없다.
그리고 기업의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의 뜨거운 미래지향적인 행복이 바로 일을 하게 하는 힘이 된다.
그러기에 세상에 나가 가루가 돼도 좋은 삶의 의지를 세워 주는 부모와 나.
나와 자식이라는 가족의 연대를 굳게 이어주어야 할 것이다.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실제적 교육이 바탕이 돼 ''사람이 된 지도자''를 만들어 가야 할 것 아닌가.
pdk@poe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