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규제완화 요구에 대한 정부의 총론적 입장은 ''수용''이다.

그러나 각론, 즉 구체적으로 어떤 규제를 완화할지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16일 정.재계 간담회에서 재계의 건의를 들어본 뒤에 입장을 정리해 발표하겠다"(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고만 밝히고 있다.

정부가 일정을 핑계삼아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하는 것은 ''아직은 명분이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침체된 경기와 달라진 기업환경 등을 생각할 때 내심으론 재계의 요구중 상당 부분을 들어주고 싶지만 ''기업구조조정을 포기했다''는 일부의 비판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게 정부쪽 딜레마다.

외환위기 직후와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달라졌으므로 규제도 바뀌어야 한다는 논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지 혹시 개혁성을 의심받지는 않을지에 대해 ''정치적인 계산''을 하고 있는 모양새가 역력하다.

14일 진 부총리의 발언에서도 그런 속내가 묻어났다.

진 부총리는 이날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규제 완화를 요구할 때는 논리와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계가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 아니라 ''이유 있는 요구를 하는 세력''으로 모양새를 갖춰 달라는 요청이다.

실제로 진 부총리는 재계 쪽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명분과 근거가 없으면 (규제완화 요구를) 받아줄 수 없으니 이런 입장을 잘 고려해 건의사항을 만들어 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명분이 서는 요구는 수용하겠다는 얘기다.

진 부총리는 이날 "정부와 재계는 똑같이 기업경쟁력 강화라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이 목표에 부합하면 수용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러나 논란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출자총액제한제도에 대해 폐지 대신 완화를 택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관측된다.

진 부총리는 "제도 폐지를 요구하려면 제도 도입의 취지가 얼마나 달성됐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며 "공정거래위원회측에 알아보니 최근 기업들이 또다시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일삼고 있다더라"고 강조했다.

출자제한제도 자체를 폐지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진 부총리는 그러나 가능한 한 재계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는 방향으로 전반적인 규제 장치를 손볼 방침임을 강력 시사해 주목된다.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 때문에 만든 규제인 만큼 재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주면 될 것"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이 출자총액제한제도에 손댈 수 없다고 한 시점은 정·재계가 본격 대화하기 이전이었다"는 등의 발언에서 그런 ''암시''가 묻어난다.

김인식 기자 sskis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