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는 서예가요 화가이며 문장가였다.

또 금석문과 서화골동의 감식안도 뛰어났다.

조선성리학을 기반으로 꽃 피웠던 진경문화가 마무리되는 시기에 태어난 추사는 ''북학''으로 불리는 청조고증학을 수용,추사체를 만들었고 많은 동료,후학들이 그를 따르면서 한 시대양식을 이뤘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추사와 그 학파''전은 추사체와 추사 인맥의 서화풍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자리다.

특히 전시회 도록을 겸해 나온 간송문화(澗松文華) 60호에 실린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의 글 ''추사 일파의 글씨와 그림''은 추사를 따른 제자들의 계보와 면면을 처음으로 정리한 역작이다.

북학파의 선각자이던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의 영향을 받은 추사는 ''글씨가 곧 그림이고 그림이 곧 글씨''라고 했다.

서화불분론(書畵不分論)이다.

추사체가 상형문자인 한자의 회화적 추상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점이나 대상의 본질만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일격화풍(逸格畵風)의 그림이 이를 입증한다.

추사는 중인 제자들의 모임에 ''서화동심처(書畵同心處)''라는 편액을 써줘 지침을 삼도록 하기도 했다.

추사가 추사체를 이룬 30대 후반께 그의 문하에는 준재들이 앞다퉈 모였고 이에 추사는 그림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림 제자들은 많았다.

신분이나 연령을 가리지 않고 추사의 필법 및 화법을 배우려 했다.

추사서파의 벽두로 꼽히며 당대의 시서화 3절로 꼽히던 신위(1769∼1845)는 추사보다 열일곱살이나 많았고 서예로 유명했던 조광진(1772∼1840)도 추사보다 연상이었다.

양반층 제자로는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수제자인 위당 신관호를 비롯해 이당 조면호,만향재 남상길,표정 민태호 등이 추사의 맥을 이었다.

또 조희룡 이상적 이한철 허유 김수철 전기 오경석 등 중인·서민층 제자도 만만찮았다.

특히 전기(1825∼1854)는 30세에 요절했지만 추사가 그의 서화를 상품(上品)으로 평가했을 만큼 경지가 높았다.

추사와 추사 제자들의 대표작 1백20여점으로 1,2층 전시장을 가득 채운 이번 전시회는 오는 27일까지 계속된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