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구조조정의 전도사''란 별칭을 떼일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두산그룹의 대변신을 주도하고 있는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대한상의 회장)은 요즘 ''전도사도 어쩔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고 말한다.

올 2월 인수한 두산중공업을 발판으로 그룹의 간판(핵심)사업을 ''술장사'' 등 소비재 산업에서 중공업 중심의 장치산업으로 바꾸는 대변신을 시도중이지만 출자총액규제에 걸려 차질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전에 일찌감치 두산의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청와대 행사에도 초청받았던 그가 정부의 재벌개혁 명분 쌓기용 각종 정책 때문에 구조조정의 벽에 부닥친 것이다.

지난 9일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선 "기존의 정책이라도 제대로 활용하면 되는데 정부가 재벌개혁이라는 명분에 집착해 출자총액규제와 같이 불필요한 신제품을 왜 자꾸 만드는지 이해가 안간다"며 ''신정책 무용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출자총액제한제도는 계열사 매각대금으로 기존 핵심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출자하는 경우에만 총액규제에서 예외로 인정해 주고 있다.

두산그룹 이재경 부사장은 "기존 산업이라도 성장성이 떨어지거나 경쟁력이 약화되면 매각하는 등 기업의 핵심사업은 수시로 변하게 되는데 기존 사업만을 우대해 주는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정보화로 산업의 부침(浮沈)이 종전보다 빨라졌으며 개발도상국이 빠르게 추격하는 가운데 핵심 사업을 기존 영위사업에 한정하게 되면 기업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된다는게 재계의 논리다.

사실 출자총액규제는 경제력 집중을 막는다는 재벌 개혁의 목표 아래 시행돼온 ''30대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제도''에서 출발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황인학 선임연구위원은 "30대 그룹 지정제도는 정부가 명분에 집착해 기업 현실을 무시하고 기존 정책을 고집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1987년∼2001년 30대 그룹중 절반에 가까운 그룹이 파산과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등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그는 지적했다.

특히 5대 그룹의 경제력 편중도(자산 기준)는 지난 87년 64.7%에서 올해 72.1%로 늘어나는 등 대규모 기업집단간 규모의 편차가 커져 30대 그룹을 한 묶음으로 동일시하는건 시대착오적이라고 황 연구위원은 주장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김석중 상무는 "30대 대규모 기업집단제도를 일시에 폐지하는게 어렵다면 상위 4∼5대 그룹으로 축소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이래야만 하위 그룹들이 △출자총액제한 △지주회사 설립 제한 △상호출자금지 △계열사간 채무보증 금지 △내부거래 규제와 같은 ''족쇄''에서 풀려 기업구조조정과 신규 투자를 원활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4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의 한 임원은 "기업이 나라를 선택하는 ''무국경 글로벌 경제시대''에 유독 우리만 경제력집중 억제논리에 사로잡혀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재벌 개혁을 후퇴시킨다는 여론에 부닥칠까봐 ''구닥다리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고 재계는 보고 있다.

경제 관료들은 입만 열면 ''재벌은 한국에만 있기 때문에 재벌정책도 한국에만 있다''고 한국적 특수성까지 거론한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시장 개방으로 인해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외국인 투자자의 비중이 30%를 넘는다.

선진 대기업과 국경을 넘어 무한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한국적 특수성을 들이대며 우리 대기업의 손발을 묶는 정책을 지속할 것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H그룹의 한 임원은 "기업들이 지난 98년말 보증잔액 기준으로 해외 현지법인에 현지금융 보증을 서도록 규제해 해외에서 일하는 기업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출자총액 한도를 외환위기 직후 없앴더니 대기업들이 문어발식 투자를 일삼아 계열사가 급증했다고 지적한다.

과연 그럴까.

SK그룹의 경우 올들어 15개 계열사를 새로 세웠다.

이중 14개는 자본금이 10억원 안팎인 정보통신 등의 벤처기업이다.

"정부가 한쪽에선 ''벤처기업을 육성하겠다''며 적극적인 투자를 유도해놓고 다른 한쪽에선 ''계열사를 늘렸으니 규제하겠다''며 칼을 대니 헷갈린다"고 S사의 K상무는 말했다.

순자산액이 1천억원인 삼성SDS의 경우 출자총액이 5백억원에 달한다.

출자총액규제로 출자액중 절반 가량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다.

이 회사는 출자 총액의 90% 정도를 안철수연구소 등 벤처기업 투자에 집중해왔다.

한 벤처기업 사장은 "대기업이 출자금 회수에 나서게 되면 그동안 구축해왔던 대기업과의 제휴선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은 물론 엉뚱한 기업에 인수합병(M&A)되는 위기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부가 재벌 개혁이라는 명분에 집착해 무리하게 쏟아내는 정책들이 곳곳에서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이다.

정구학 기자 c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