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전부터 구조조정을 실시한 데다 주력사업까지 과감히 팔아치워 구조조정의 ''모범답안''으로 회자되고 있는 두산그룹.

구조조정을 잘한 기업으로 뽑혀 대표가 청와대 초청까지 받았던 두산이 요즘 딜레마에 빠졌다.

재무안정성을 확보한 만큼 다음 프로그램, 다시 말해서 성장성과 수익성 높은 쪽으로 사업구조를 재구축하는 2단계 구조조정을 계획하고 있으나 예상치도 않았던 출자총액제한제도가 되살아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 구조조정 모범기업의 속앓이 =두산은 지난 2월에 인수한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발판으로 그룹의 간판(핵심)사업을 주류 등 소비재에서 선박엔진.발전설비 중심의 장치산업으로 바꾸는 대변신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컨소시엄을 구성, 한국전력 자회사인 한전기공과 한국전력기술 매각입찰에 참여한 것도 그 일환이다.

하지만 한중 인수로 정부가 정해놓은 출자한도를 이미 초과했다는 판정이 나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두산은 출자총액제한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초과출자분을 내년 3월까지 처분해야 한다.

한전기공과 한국전력기술을 인수할 경우 초과출자분이 더욱 늘어나게 돼 2단계 구조조정계획 자체를 손질해야 할지도 모르는 형편이다.

정부는 ''문어발식'' 확장의 폐해를 차단키 위해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지난 4월 부활시켰다.

명분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달기 어렵다.

그러나 두산의 사례에서 보듯 현실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명분에 집착한 정부의 개혁정책이 한편에서는 구조조정을 가로막고 있다는 얘기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출자총액제한 제도는 계열사 매각대금으로 출자를 하더라도 ''기존''의 핵심역량을 강화하는데 사용할 때만 총액규제에서 예외로 인정해 준다.

두산처럼 신규사업에 출자하는 경우엔 예외적용을 받지 못하게 돼있다.

두산그룹 이재경 부사장은 "기존 산업이라도 성장성이 떨어지거나 경쟁력이 약화되면 매각하는 등 기업의 핵심사업은 수시로 변하게 되는데 기존의 사업만을 우대해 주는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 불공평한 대기업집단지정제도 =출자총액규제는 경제력 집중을 막는다는 재벌개혁 목표 아래 시행돼온 ''30대 대규모 기업집단지정제도''에서 출발한다.

한국경제연구원 황인학 선임연구위원은 "30대 그룹 지정제도는 정부가 명분에 집착해 기업현실을 무시하고 기존 정책을 고집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1987∼2001년 30대 그룹중 절반 가까이가 파산과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등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특히 5대 그룹의 경제력 편중도(자산기준)는 1987년 64.7%에서 올해 72.1%로 늘어나는 등 대규모 기업집단간 규모의 편차가 커져 30대 그룹을 한 묶음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황 연구위원은 주장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김석중 상무는 "30대 대규모 기업집단제도를 일시에 폐지하는게 어렵다면 상위 4∼5대 그룹으로 축소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정부가 재벌개혁을 후퇴시킨다는 여론에 부닥칠까봐 ''구닥다리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고 재계는 보고 있다.

경제관료들은 입만 열만 "재벌은 한국에만 있기 때문에 재벌정책도 한국에만 있다"고 한국적 특수성까지 거론한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이에 대해 "시장개방으로 인해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외국인 투자자의 비중이 30%를 넘는다.

선진 대기업과 국경을 넘어 무한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한국적 특수성을 들이대며 우리 대기업의 손발을 묶는 정책을 지속할 것인지 묻고 싶다"고 반박했다.

◇ 헷갈리는 정부정책 =공정거래위원회는 출자총액한도제를 외환위기 직후 없앴더니 대기업들이 문어발식 투자를 일삼아 계열사가 급증했기 때문에 이 제도를 부활시켰다고 설명한다.

과연 그럴까.

SK그룹의 경우 올들어 15개 기업을 계열사로 편입시켰으나 이중 14개는 자본금이 10억원 안팎인 정보통신 등의 벤처기업이다.

"정부가 한 쪽에선 ''벤처기업을 육성하겠다''며 적극적인 투자를 유도해놓고 다른 한 쪽에선 ''계열사를 늘렸으니 규제하겠다''고 칼을 대니 헷갈린다"고 S사의 K 상무는 말했다.

순자산액이 1천억원인 삼성SDS의 경우 출자총액이 5백억원에 달한다.

출자총액규제로 출자액중 절반 가량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다.

이 회사는 출자총액의 90% 정도를 안철수연구소 등 벤처기업 투자에 집중해 왔다.

최근에는 신규출자를 사실상 중단한 상태이며 기존 출자금을 줄이는 방안을 마련하느라 부심하고 있다.

한 벤처기업 사장은 "대기업이 출자금 회수에 나서게 되면 그동안 구축해 왔던 대기업과의 제휴선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은 물론 엉뚱한 기업에 인수.합병(M&A)되는 위기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구학 기자 c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