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정신 살찌울 문화 명소는 .. 하응백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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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군 진보면 원리동 두들마을.
작가 이문열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지난 5월12일 오후2시, 문인들과 지역 주민, 관계인사 등 2천여명이 모여 ''광산(匡山)문학연구소'' 현판식을 가졌다.
1백20여가구로 이루어진 재령 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 아마도 이만한 인파가 모인 것은 처음이리라.
산이라기보다는 나지막한 동산에 가까운 광려산(匡慮山) 남쪽 자락 대지 7백50평에 ㅁ자 형태로 자리잡은 건평 1백20평의 전통 목조건물.
안채.사랑채.강당.정자 등으로 이루어진 이 연구소는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를 썼던 이문열이 고향에 뼈를 묻기 위해 관(官)의 도움을 얻고, 자신의 사재 6억여원을 들여 정성껏 지은 건물이다.
고대광실(高臺廣室), 이 한마디가 바로 떠오를 정도로 연구소는 마을의 규모에 비해서 높고 컸다.
방방마다 벌어진 주연(酒宴)을 마다하고 나선 마실 길에서 나는 연구소 조금 아래에 위치한 이문열의 생가(生家)로 들어섰다.
방치돼 퇴락한 집.
이문열 집안이 전쟁 후 2백년 세거지를 친척에게 넘긴 후부터 허물어졌는가.
이문열의 가형(家兄)이 흙에서 집안 경제를 일으켜 세우려고 낮밤으로 개간했던 황무지 3만평이 저 멀리 여전히 벌거숭이로 누워 있다.
가친(家親)이 월북하고 가형의 고향에서의 마지막 노력도 도로(徒勞)에 그친 뒤 이문열은 문(文)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봄날 고래 등 같은 집을 지어 환향했다.
흥망과 성쇠가 한 마을에, 5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났으니 아무리 잔칫집에 초대되었다 해도 어찌 비감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보면 무너진 생가에서 광산문학연구소까지의 몇발자국 되지 않는 거리가 이문열의 살아온 자취이며 그의 문학적 궤적일지도 모른다.
출향과 방랑, 입문(入文)과 문명(文名), 문운(文運)과 귀향은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 ''레테의 연가'' ''영웅 시대'' ''금시조'' ''선택'' ''아가'' ''변경''에서 실제보다 앞서 반복 진행되었다.
귀향은 그의 문학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까.
하객들이 얼마간 빠져 나가 한 숨 돌린 이문열에게 ''어떠시냐''고 물어보았다.
이문열은 문단 말석의 평론가에게 ''배고프다''라고 말했다.
행사 준비와 손님 접대로 점심을 걸러서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는 그의 반평생이 담겨 있다.
지식과 문학과 문명(文名)의 배고픔이 그의 반평생을 지배했던 것이다.
''이제는 돌아와 고향 앞에 선'' 이문열에게 고향과 새집은 어떤 말을 속삭이고 있을까.
이문열과 관(官)이 각각 반을 분담해 광산문학연구소가 지어졌다 해도 이 연구소는 이문열 개인의 것이 아니다.
지금 한국에는 현대판 문화 명소 혹은 유적이 너무나도 빈약하다.
풍광 좋은 곳에 새로 들어서는 것은, 놀이동산이나 골프장이나 러브호텔이다.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는 문화 명소는 너무나도 부족하다.
전국 각지를 여행하다 보면 유명 현대 문인의 생가나 유적지가 그나마 잘 보존되고 관리되는 것이 강원도 평창의 이효석 생가나, 전남 강진의 김영랑 생가 정도이다.
광산문학연구소에 대한 부러움의 질시가 두들마을에, 또 문단 일각에 새록새록 숨어 있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이문열의 문학적 도정(道程)이 완결된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지금 지어진 광산문학연구소나, 연전에 개관한 원주 토지기념관과 같은 문학 공방(工房)이 전국 구석구석에 있어 미래 한국 작가들의 창작욕에 불을 댕기고, 한편으로 지역의 문화 명소로 자리한다면 21세기 한국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후대에서는 기억하리라.
그렇게 보면 배고픈 이문열은 연구소의 주인이 아니라 시를 뿌리고 ''사람''을 모시는 머슴이다.
머슴의 초발심(初發心)이 장구하다면 정자 아래 연못에 갓 심어 자리 잡지 못한 어린 연잎 두엇이 제대로 뿌리내려 연못을 뒤덮으리라.
오지(奧地)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영양 땅 한 가운데 높다랗게 자리잡은 광산문학연구소에서 바라보는 다섯시간의 귀경(歸京)길은 멀기만 했다.
작가 이문열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지난 5월12일 오후2시, 문인들과 지역 주민, 관계인사 등 2천여명이 모여 ''광산(匡山)문학연구소'' 현판식을 가졌다.
1백20여가구로 이루어진 재령 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 아마도 이만한 인파가 모인 것은 처음이리라.
산이라기보다는 나지막한 동산에 가까운 광려산(匡慮山) 남쪽 자락 대지 7백50평에 ㅁ자 형태로 자리잡은 건평 1백20평의 전통 목조건물.
안채.사랑채.강당.정자 등으로 이루어진 이 연구소는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를 썼던 이문열이 고향에 뼈를 묻기 위해 관(官)의 도움을 얻고, 자신의 사재 6억여원을 들여 정성껏 지은 건물이다.
고대광실(高臺廣室), 이 한마디가 바로 떠오를 정도로 연구소는 마을의 규모에 비해서 높고 컸다.
방방마다 벌어진 주연(酒宴)을 마다하고 나선 마실 길에서 나는 연구소 조금 아래에 위치한 이문열의 생가(生家)로 들어섰다.
방치돼 퇴락한 집.
이문열 집안이 전쟁 후 2백년 세거지를 친척에게 넘긴 후부터 허물어졌는가.
이문열의 가형(家兄)이 흙에서 집안 경제를 일으켜 세우려고 낮밤으로 개간했던 황무지 3만평이 저 멀리 여전히 벌거숭이로 누워 있다.
가친(家親)이 월북하고 가형의 고향에서의 마지막 노력도 도로(徒勞)에 그친 뒤 이문열은 문(文)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봄날 고래 등 같은 집을 지어 환향했다.
흥망과 성쇠가 한 마을에, 5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났으니 아무리 잔칫집에 초대되었다 해도 어찌 비감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보면 무너진 생가에서 광산문학연구소까지의 몇발자국 되지 않는 거리가 이문열의 살아온 자취이며 그의 문학적 궤적일지도 모른다.
출향과 방랑, 입문(入文)과 문명(文名), 문운(文運)과 귀향은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 ''레테의 연가'' ''영웅 시대'' ''금시조'' ''선택'' ''아가'' ''변경''에서 실제보다 앞서 반복 진행되었다.
귀향은 그의 문학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까.
하객들이 얼마간 빠져 나가 한 숨 돌린 이문열에게 ''어떠시냐''고 물어보았다.
이문열은 문단 말석의 평론가에게 ''배고프다''라고 말했다.
행사 준비와 손님 접대로 점심을 걸러서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는 그의 반평생이 담겨 있다.
지식과 문학과 문명(文名)의 배고픔이 그의 반평생을 지배했던 것이다.
''이제는 돌아와 고향 앞에 선'' 이문열에게 고향과 새집은 어떤 말을 속삭이고 있을까.
이문열과 관(官)이 각각 반을 분담해 광산문학연구소가 지어졌다 해도 이 연구소는 이문열 개인의 것이 아니다.
지금 한국에는 현대판 문화 명소 혹은 유적이 너무나도 빈약하다.
풍광 좋은 곳에 새로 들어서는 것은, 놀이동산이나 골프장이나 러브호텔이다.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는 문화 명소는 너무나도 부족하다.
전국 각지를 여행하다 보면 유명 현대 문인의 생가나 유적지가 그나마 잘 보존되고 관리되는 것이 강원도 평창의 이효석 생가나, 전남 강진의 김영랑 생가 정도이다.
광산문학연구소에 대한 부러움의 질시가 두들마을에, 또 문단 일각에 새록새록 숨어 있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이문열의 문학적 도정(道程)이 완결된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지금 지어진 광산문학연구소나, 연전에 개관한 원주 토지기념관과 같은 문학 공방(工房)이 전국 구석구석에 있어 미래 한국 작가들의 창작욕에 불을 댕기고, 한편으로 지역의 문화 명소로 자리한다면 21세기 한국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후대에서는 기억하리라.
그렇게 보면 배고픈 이문열은 연구소의 주인이 아니라 시를 뿌리고 ''사람''을 모시는 머슴이다.
머슴의 초발심(初發心)이 장구하다면 정자 아래 연못에 갓 심어 자리 잡지 못한 어린 연잎 두엇이 제대로 뿌리내려 연못을 뒤덮으리라.
오지(奧地)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영양 땅 한 가운데 높다랗게 자리잡은 광산문학연구소에서 바라보는 다섯시간의 귀경(歸京)길은 멀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