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8월.

강경식 당시 재정경제원 고위관료들과 일단의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사들이 영화 한편을 찍었다.

제목은 ''21세기 국가과제''.

재경원이 "국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주고 경제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마련한 역작 ''5대분야 21개 국가과제''를 선전하는 15분짜리 홍보영화였다.

전국의 모든 개봉관이 본영화 상영 전에 이 홍보영화를 틀 계획이었지만 내부 반발도 적지 않아 무산됐다.

대신 재경원 고위관료들은 전국 순회강연을 다니며 희망찬 미래를 역설했다.

외환 위기의 먹구름이 막 발밑을 파고드는 순간 한국의 경제관료들은 이렇게 ''꿈과 희망''을 내세우며 전국 버스투어를 하고 있었다.

3년7개월이 지난 2001년 5월 18일.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또 다시 21세기 국가비전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이날 경제정책조정회의에 보고된 ''비전 2011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구조개혁 만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우리경제의 미래좌표를 설정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원을 발굴해야 하기 때문에" "국가 미래상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

97년 당시의 희극이 재상연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달라진 것이라곤 ''열린 시장 경제로 가기 위한 21개 국가과제''가 ''열린 세상, 유연한 사회를 위한 16대 과제''로 바뀐 것 뿐이다.

경제관료들이 중장기 경제정책 방향을 고민하는 것 자체에 대해선 시비를 걸 생각이 없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고 좋은 정책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관료적 고민''을 국가사업인양 확대시키고 그 결과에 대해 국민의 동의를 강요하려 한다면 이는 분명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사회에서 국가 비전을 만드는 일은 미안하게도 관료들이 아닌 정치인과 정당에 맡겨져 있다.

대통령 선거가 내년이란 점을 생각하면 더욱 관료들이 나설 때가 아니다.

진념 경제팀의 ''비전 2011'' 추진계획을 보며 97년 10월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일이다.

경기를 살리고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묘수를 찾는 것만으로도 진 부총리의 머릿속은 충분히 복잡할텐데.

김인식 경제부 기자 sskis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