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주차장까지 리포트 뭉치를 들어다 준 남학생이 물었다. "이번 여름에 유럽 배낭여행을 가는데 어디 가야 좋을까요"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여행'이란 단어가 박하향기처럼 가슴의 촉수를 건드렸다. 아, 또다시 여름이 왔구나…. 매년 여름이 되면 많은 젊은이들이 유럽으로 몰려간다. 고대 로마에서부터 중세와 르네상스, 자유의 상징인 에펠탑까지의 긴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유레일을 타고 아무 곳에서나 내리고, 아무 때나 떠날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유럽 각지를 떠도는 여행객 중에는 배낭족과 비닐족이 있다. 배낭족은 말 그대로 배낭을 메고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렇다면 비닐족은? 이는 도둑에게 다 털리고 비닐 봉지에 사물을 넣어 덜렁거리며 들고 다니는 여행객을 지칭한다. 작년 여름, 유럽에 갔을 때의 일이다. 로마에서 만난 어느 한국 대학생이 하룻동안 이탈리아를 찍고 다녔다고 고백했다. "새벽 일찍 피렌체에 도착해서 두오모 성당이랑 둘러보고, 그 다음엔 피사로 갔죠. 졸다 깨보니까 창 밖으로 비행기 꼬리가 보이는 거예요. 피사를 지나쳐서 피사 에어포트까지 간 거예요. 자는 사람들을 깨워 거꾸로 기차를 타고 피사에 가서 사탑이랑 눈 맞추고, 곧장 베니스로 갔어요. 레알토 다리 근처에 한국인 민박집이 있다고 해서, 그 무거운 배낭을 지고 한밤중에 낑낑거리며 찾아갔어요. 거기 길이 얼마나 꼬불꼬불 요상한지 알죠? 생선가게 바로 옆이라고 했는데 다들 문 닫았잖아요. 코로 킁킁거리면서 생선 냄새가 나는 가게를 겨우 찾았죠. 그런데 민박집 문에 쪼그만 쪽지가 붙어 있잖아요.'당분간 쉽니다' 황당하고 하늘이 노랬어요. 호텔 값은 엄두도 못 내고…. 남자 다섯명이 야밤에 이따만한 배낭을 메고 산마르코 광장까지 걸어가서, 사진 한방씩 쾅쾅 찍고, 야간 기차를 타고 로마에 온 거예요. 도대체 여행이 아니라 극기훈련 온 것 같아요" 나 역시 폭염이 쏟아지는 로마에서 극기훈련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한때 여행이 삶의 전부였던 친구는 내가 이탈리아로 떠난다고 하자 이렇게 충고했다. "여행을 가서도 일주일에 하루는 꼭 쉬어야 합니다" 그러나 로마에 가면 휴일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방에 구경할 것 천지이기 때문이다. 말벗도, 식견있는 안내인도 없는 일정 속에서 고독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나는 하루종일 두 눈을 부릅뜨고 쏘다녔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내가 보고자 노력한 만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꼭 봐야 할 것들이 물이 새듯 빠져 나가는 것은 아닌지.그런 초조한 생각에 아침마다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가 밤이 되면 파김치가 돼 돌아오곤 했다. 덕분에 살갗은 양파 껍질처럼 계속 벗겨졌고, 발바닥은 물집이 잡히고 터지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면서 더욱 야성적으로 변해갔다. 어둠과 노란 불빛의 덩어리가 어른거리는 거리에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여행자는 여행자처럼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여행자는 자신이라는 거대한 무지의 세계를 움켜 쥔 수도승이 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은 백과사전이 될 필요도 없다. 천천히 느린 보폭으로 숨을 깊이 들이키고,한쪽 눈을 감은 채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사념에 잠긴 표정으로 주위를 건성건성 둘러보아야 한다. 목이 마르기 전에 물을 마셔야 하는 것처럼, 정신이 피로하기 전에 적당히 망각할 줄도 알아야 한다. 여행을 다니는 것은 지도가 확실한지 대조하러 다니는게 아니다. 지도를 접고 여기저기 헤매다 보면 차츰 길이 보이고,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보인다. 곳곳에 숨어 있는 비밀스러운 미로처럼 인생의 신비가 베일을 벗고 슬그머니 다가올 때도 있다. 어느 낯선 골목에서 문득 들려온 낮은 음악소리처럼 예상할 수 없는 기쁨이 곳곳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옛말이 있다. 그러나 로마에 와서는 길을 잃어버려야 한다. 어둠조차 다정한 도시에서 무작정 걷고 또 걸을 때, 그것은 길을 잃기 위해서고 또한 길을 찾기 위해서다. 우리는 그러기 위해서 길을 떠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