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가람 이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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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에 오면 국학연구자들 가운데도 변절자가 많이 생긴다.
문학가는 감옥에도 가기전에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썼고 국문학자 국사학자들도 변절하거나 몸을 사린 인물이 많았다.
그런데 국어학자들은 변절자가 거의 없었다.
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서 보듯 고문에 못이겨 죽을지언정 누구 하나 변절하지 않았다.
한글을 비롯한 민족문화에 대한 애정과 신념이 그만큼 강했다는 얘기다.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1891~1968)도 그중 한 사람이다.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그는 한학을 한 뒤 뒤늦게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에 나간 것이 인연이 돼 한글운동에 앞장섰다가 조선어학회사건때는 옥고를 치렀다.
국학관계 문헌 수집광이었던 가람은 교사생활을 하면서 학문보다는 시조창작을 위해 국문학을 섭렵했다.
전통시조의 연구결과를 신문 잡지에 발표하면서 시조의 혁신을 창작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그는 39년 '가람시조집'을 내놓는다.
'나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누우시던 날/쓰린 괴로움을 말도 차마 못하시고/매었던 옷고름 풀고 가슴 내어 뵈더이다' 시조집에 실린 '젖'의 첫 연은 고정된 주제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느낀 그대로를 드러내는 그의 시조혁신의 내용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눌한 듯한 순 우리말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절실한 내용을 담았다.
시인 정지용이 발문에서 '이병기에 이르러서 시조가 시인을 만났다'고 극찬한 것도 아마 그런 의미가 아닌가 싶다.
가람의 주된 공적은 시조의 현대시풍 확립이지만 대학에 재직하면서 국문학과 서지학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중록''인현왕후전''춘향가'를 비롯 판소리 등을 발굴,소개한 공로는 자못 크다.
가람은 술복 문복 제자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했다.
일제때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단 한편의 친일문장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6월은 문화부가 정한 시조시인 이병기를 기리는 달이다.
오늘날 시조가 내실을 저버리고 말재주나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