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골프에 대한 애정은 나이가 들어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한 겨울 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도 "설경이 좋다"며 라운드를 하곤 했다.

그러면 직원들이 총동원돼 눈을 치우고 보조캐디가 여러명 붙었다.

날씨가 추워도 라운드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는 없었다.

꼭 18홀을 다 돌았다.


1976년 9월 일본에서 위암수술을 받고 온 뒤에도 골프장에 가끔 들렀다.

골프는 못하더라도 수요회에 참가,차를 마시면서 예전의 그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가을이 와 잔디가 누렇게 되면 몹시 안타까워했다.

이를 본 큰딸 이인희씨는 ''일본에서 이렇게 하는 것을 봤다''며 그린에 파란 물감을 칠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라도 올라치면 물감이 번져 보기가 흉했다.

이러다보니 나중에는 그린을 비닐로 덮어 두었다가 이 회장이 나오는 수요일과 일요일에 벗겨 푸르름을 유지하곤 했다.

지난 87년,이 회장이 작고하기 며칠 전이니까 10월27일께로 기억한다.

골프카트를 타고 라이트를 켠 채 생전 마지막 라운드를 한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그 날은 낮부터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이 회장은 그때 부축을 해주어야 2층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 회장은 그날 오후 4시30분께 갑자기 "스파이크를 가져오라"고 했다.

날이 흐려 어두컴컴해지려는 시간이었기에 직원들은 ''뜻밖이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후배인 이강선 프로가 안양골프장에서 근무했는데 이 프로는 스파이크와 볼,클럽,골프카트를 준비해갔다.

이 회장이 1번홀 티잉그라운드에 올라섰다.

이 프로가 "한 번 쳐보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이 회장은 "응,가져와 보게"라고 말했다.

볼이 잘 맞을 리 없었다.

첫 번째 티샷은 헛스윙이나 다름없었고 두 번째 시도한 샷도 약 10m 전진하는 데 그쳤다.

그러자 이 회장은 이 프로에게 "이군도 치라"고 말했다.

이 프로가 샷을 날리자 "가자"며 앞으로 나갔다.

세컨드샷 지점에 가니 이 회장은 "내 볼이 어디 있는가"라고 물었고 이 프로가 볼을 찾아주자 그때부터 평상시 라운드와 똑같이 플레이를 진행했다고 한다.

3번홀에 다다라 날이 컴컴해지자 이 프로가 "들어가시죠"라고 했고 이 회장은 "응,들어가지"라고 대꾸했다.

이 회장은 그러나 4번홀이 파3홀이기 때문에 그 홀을 마저 마치고 5번홀 대신 클럽하우스로 향하는 8,9번홀로 이동하려는 요량이었던 것 같았다.

4번홀 티샷을 할 때부터는 불을 켜야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골프장에 있던 골프카트 4대,오토바이 2∼3대,회장님차에 달려있는 헤드라이트를 모두 밝혀 이 회장을 향하도록 했다.

물론 그런 상태로 8,9번홀도 마쳤다.

불을 켜고 라운드한 것은 그 세 홀이 전부였다.

이 회장은 그래도 아쉬웠던지,10번홀을 한 번 둘러보고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당시 현관 앞에는 모형그린이 있었는데 이 회장은 카트를 탄 채 그 그린을 세바퀴 돌았다.

그 뒤로 이 회장은 안양골프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 20일 후 타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회장은 ''마지막 라운드'' 때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정리=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