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시골의사를 사랑하지 않으랴 .. '간장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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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으랴.
하얀 양복에 나비넥타이,중절모까지 눌러쓴 이 멋쟁이 신사는 한손에 가방을 든채 시골길을 달리고 또 달린다.
미군 정찰기가 날고 공습경보가 울려퍼지는 가운데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는 그는 "개업의는 발이 생명이요,다리가 부러지면 손으로라도 달린다"라는 시골마을 의사 아카키 선생(이모토 아키라).
환자마다 "간염"이라고 진단하는 바람에 "간장선생"이라는 애칭을 얻었고 때로 돌팔이라는 수군거림을 받기도 하지만 동네사람들의 갖은 걱정거리에 귀를 기울이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다.
창녀든 전쟁포로든 그에겐 그저 "사람"일 뿐.
전쟁보다 무서운 간염을 퇴치하겠다는 일념에 불타는 뜨겁고 순수한 인간애는 그를 동으로 서로 누비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일본 영화의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75)의 최근작 "간장선생"(Kanzo Sensei.98년작)은 "우나기""나라야마 부시코"같은 그의 전작들과 전혀 다르다.
칸영화제에서 두번이나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그의 이전 작품들이 인간본성과 욕망을 섬득할만큼 예리한 시선으로 꿰뚫으며 정서적 각성을 안겼던 반면 "간장선생"은 한결 명랑하고 가벼운 분위기.
배경은 1945년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러 미군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가하기 얼마전.
"간장선생"이라 불리는 아카키 선생은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간염박멸에 앞장선다.
모르핀에 중독된 외과의,알콜중독인 주지스님,젊은 창녀 소노코,"조국을 위해 몸바친다"는 기생집 여주인처럼 주류와는 동떨어진 사람들이 그를 돕는다.
죽은이가 벌떡 일어나 유언을 하는 황당한 설정에 이르기까지 영화엔 숨죽여 키득거릴만한 유머들이 구석구석 스며있다.
"영화를 따라가는게 피곤한 일이 돼서는 안된다.
내 영화가 관객을 무겁게 짓누르지 않고 편안하게 숨쉬게 해주는 것이었으면 한다"는 게 감독의 뜻.
코믹한 틀을 빌리고는 있지만 삶의 "진정성"을 관통해내는 감독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롭다.
아기자기한 유머속에서도 전쟁의 허울,사람들을 광기로 내모는 군국주의를 사정없이 비판하고 파시즘에 희생된 무고한 원혼에는 진심어린 조의를 표한다.
아버지뻘 되는 의사선생에게 "사랑하므로 공짜로 자주겠다"고 덤벼드는 젊은 창녀 소노코는 맑은 영혼과 건강한 생명력으로 삶을 유지시키는 근원적 힘으로 격상된다.
"영웅"이 빠지기 쉬운 허영과 공명심의 함정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데에 이르면 서늘한 전율이 일 정도다.
동경의대 의사회에서 "간염박멸"의 선구자로 갈채받은후 그를 간절히 찾는 노파환자의 청을 뿌리치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그에겐 허영의 그림자가 어린다.
환자의 장례식장에서 그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박수소리는 인간의 유약함을 준엄히 일깨우는 성찰의 소리다.
원폭후 솟아오르는 버섯구름을 보고 "저건 엄청 비대해진 간의 형상이야.인간을 좀먹는 전쟁.전쟁을 혐오하는 민중들의 목소리야"라는 간장선생의 외침은 전쟁의 비극성에 주목하는 감독의 비통한 목소리에 다름아니다.
16일 개봉.
김혜수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