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토로라 코리아의 교훈 ] '단순조립에서 연구개발(R&D)센터로' 지난 1967년 모토로라는 값싸고 성실한 한국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이 땅에 들어왔다. 이제는 핵심 연구개발 센터를 한국에 둘 정도로 뿌리를 내렸다. 모토로라의 '한국정착'은 다국적기업의 글로벌전략과 한국의 산업발전 단계 및 전략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드문 성공 케이스다. 장윤종 산업연구원 디지털경제실장은 "진출국의 산업정책이나 비즈니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철수해 버리는 다국적기업들이 허다하다"면서 "모토로라는 앞으로 한국이 양질의 외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어떤 산업정책과 환경을 만들어야 할지에 대한 모범사례"라고 말했다. 한국의 수출 입국과 모토로라의 글로벌 전략이 맞아떨어지다 =모토로라가 서울 광장동에 반도체 조립공장을 지은 60년대 말은 한국이 경제개발을 위해 외국기업의 기술력과 자본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이 덕분에 모토로라는 한국 정부의 환대를 받으면서 들어왔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모토로라는 한국정부의 수출 입국에 적극적으로 부응, 생산제품의 거의 전량을 수출했다. 지난 30여년 동안 수출 총액은 41억달러에 달한다. 고용창출 효과는 연인원 10만명에 이른다. 80년대 중반에는 국내 전자산업 수출의 10%를 차지할 정도였다. 미국 모토로라 본사는 지난 1994년 광장동 공장을 경기도 파주로 이전, 반도체는 물론 휴대폰 무전기 통신장비 등을 종합적으로 생산하는 아시아지역의 생산기지로 키운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한국 정부는 다시 한번 모토로라에 '화끈한' 지원을 해주었다. 당시 파주는 군사보호지역으로 대규모 공장을 설립하기 어려운 각종 규제가 많았고 인프라 시설도 열악했다. 결국 청와대 경기도 파주시가 관-관 협조체제를 가동, 통상 1년이 걸리는 인허가 절차를 6개월로 단축하고 5년가량 걸리는 공장설립 기간을 1년4개월 만에 끝냈다. 군사보호지역까지 풀어가면서 지원했지만 반도체 철수 =당시 문민정부는 "휴전선 바로 밑에 미국의 세계적인 기업이 둥지를 트는 것은 미군 1개 사단이 주둔하는 효과보다 크다"면서 '안보효과'까지 기대할 정도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97년 공장이 준공되고 난 뒤 일이 틀어졌다. 미국 본사에서 아시아 전략을 새로 짜면서 파주 공장 수익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선 것. 90년대 중반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중국 톈진 반도체 생산공장에 비해 한국 공장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분석도 '한국철수'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정부가 국내 기업들로부터 '역차별의 극치'라는 불만을 들어가면서 지원한 보람도 없이 결국 모토로라는 99년 7월 반도체 사업부문의 구조조정 차원에서 파주공장을 대만의 반도체 회사인 ASE에 1억4천만달러를 받고 매각했다. "파주공장의 임직원 전원을 ASE가 고용승계하고 생산량의 95% 이상을 미국 본사에서 수입해가는 조건으로 파주공장을 팔았기 때문에 모토로라와 한국 모두가 '윈윈'할 수 있었다"(모토로라코리아 최인학 상임고문) 한국반도체 사업을 정리했지만 모토로라는 짐을 꾸리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기엔 너무 매력적인 또 다른 비즈니스가 이 땅에서 급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신대국 '한국'에서 R&D 거점을 키운다 =지난 88년부터 한국에 아날로그 휴대폰을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던 모토로라로서는 90년대 중반부터 휴대폰 시장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한 한국을 외면할 수 없었다. 게다가 96년 한국이 CDMA(부호분할다중접속)를 처음으로 상용화하고 삼성전자 등 국내 업체들이 CDMA용 단말기를 잇따라 내놓으면서 모토로라는 큰 충격을 받았다. 모토로라코리아 관계자는 "CDMA가 상용화되기 몇 년 전부터 미국 본사에 CDMA용 단말기를 서둘러 개발해야 한다고 숱하게 보고했지만 본사에서는 유럽 방식인 GSM을 먼저 할 것이라며 일축했었다"고 회고했다. 모토로라는 결국 한국에 CDMA 관련 연구개발(R&D) 전진기지를 세우고 휴대폰 생산은 지분을 투자한 국내 벤처기업인 어필텔레콤과 팬택에 맡기는 새로운 한국 전략을 세웠다. 기획취재부 오춘호.조일훈.장경영 기자 ohchoon@hankyung.com [ 매주 木.金 연재 한국언론재단 지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