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위세는 정말 대단했다.

많은 사람들이 김 부장을 몹시 두려워했고 국회의원들도 그 앞에서는 꼼짝을 못했다.

당시 김 부장의 별명은 ''불독''이었다.

김 부장은 골프를 칠 때 볼은 항상 타이틀리스트 3번만을 썼다.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듯했다.

남들이 3번을 쓰면 "내가 3번을 쓰니까 3번은 쓰지 마시오"라고 말할 정도였다.

중앙정보부장직을 그만둔 김 부장을 다시 만난 것은 1971년 아르헨티나에서였다.

당시 나는 이일안 프로와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카나디언컵(지금의 월드컵)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김 부장은 외국을 여행하던 중 우리를 만났고 밥도 사주며 도움을 줬다.

귀국길에는 아예 김 부장 일행과 동행을 하게 됐다.

김 부장은 엘살바도르대통령 초청으로 그 나라에 들렀다.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하고 대통령이 주최한 골프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멕시코에도 들러 대사관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골프도 쳤다.

다음날에는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는 김 부장의 가족들이 있었다.

가족들은 70층 정도 되는 고층아파트의 50층 정도에 살고 있었다.

평수는 50평 가량 됐다.

우리는 김 부장 집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김 부장만 집에 남고 일행들은 귀국길에 올랐다.

김 부장은 프로골퍼들에게 잘 하기도 했지만 유망한 프로의 선수생명을 끊기도 했다.

김 부장은 66년 동료인 김성윤(당시 28세) 프로를 끌고가 혼낸 적이 있다.

김 프로는 김 부장을 코치한 레슨프로였다.

심지어 중앙정보부 촉탁사원으로까지 임명해 김 부장을 옆에서 가르치도록 한 프로다.

김 프로는 술을 좀 좋아했다.

그런데 술을 먹으면서 자신이 중앙정보부에 있다느니,김 부장이 어떻다느니 위세를 부린 모양이었다.

이게 김 부장 귀에까지 들어갔다.

김 부장은 즉각 김 프로를 연행하도록 지시했다.

3∼4일 후에 김 프로가 나왔는데 허리와 폐 등에 심한 부상을 당했다.

김 프로는 이후 선수생활을 더 이상 하지 못했다.

죽을 고비도 몇차례 넘길 정도로 엄청난 고생을 해야만 했다.

김 프로는 ''서울CC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1년간 추방됐다가 김종필씨의 중재로 가까스로 해제받았다.

그래도 자신의 골프 스승인데 너무 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