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초 대형 리모델링업체가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제법 큰 규모의 대학병원을 개보수할 때의 일이다. 수술실을 개보수하는 공사였다. 지은지 30여년된 이 병원은 그동안 수술실개보수공사를 몇차례 한 적 있다. 새로 개보수공사를 맡았던 이 업체도 수술실의 특수상황을 감안,한개의 수술실공사가 끝나면 다른 수술실을 리모델링하는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첫번째 시작한 수술실의 내부공사를 어느 정도 끝내고 배선 배관교체를 위해 천정을 뜯어내고 진단하던중 도면에 나타나지 않은 전기배선 하나를 발견했다. 문제는 이 배선을 잘라야 하느냐,마느냐였다. 왜냐하면 이웃한 수술실에선 수술이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선을 잘못 절단했다가는 수술중인 환자의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돼 일단 공사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술실 개보수공사의 특수상황을 감안,필요한 배선 배관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눠 도면을 모두 새로 그렸다. 도면내용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서울 명동중심가에 있는 의류매장을 고급 헬스클럽으로 리모델링하면서 황당한 경우를 당했다. 1930년대에 지어진 이 건물의 도면은 한 장도 없었다. 지난 95년 개보수했을 때의 기록은 남아있었지만 마감내용에 대한 도면이었지 구조에 관한 기록은 전무했다. 일단 공사에 착수했다. 지하층이 없는 이 건물의 바닥을 뜯어냈을 때 놀라운 현장이 목격됐다. 무게를 받쳐주는 슬라브가 없었던 것이다. 맨 바닥에다 곧바로 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시공하는 모르타르공사를 한 셈이다. 삼성물산은 슬라브공사를 했고 추가 공사비용을 놓고 건축주와 낯을 붉여야 했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도면만 있었더라면."이라고 아쉬워했다. 건축물의 이력서로 불리는 도면기록이 없다. 리모델링업체들이 수주한 공사를 시작하기 앞서 건축주에게 도면을 보여달라고 부탁하면 "무슨소리"냐는 반응이라고 하소연이다. 도면기록의 부재는 리모델링산업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환자와 병상기록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 병치레가 잦은 환자의 병상기록이 완벽하다면 어떤 의사라도 그 환자의 현재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병상기록이 없으면 새로 진단해야 한다. 그리고 시행착오도 많을 것이다. 병상기록이 있을 때보다 시간과 비용이 더 들어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건축물의 도면기록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번듯한 건물이라도 도면기록이 없으면 개보수해야 할 시기에 제대로 처방을 받을 수 없다. 신축건물 뿐 만 아니라 리모델링한 건물의 경우도 도면기록을 꼭 남겨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리모델링하면서 기둥 보 등 주요 구조물을 옮긴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다음번 개보수때 안전하게 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면기록 보존을 당연시 하는 선진국의 사례를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싱가포르에서 우체국을 호텔로 리모델링하는 현장을 최근 다녀온 업체관계자는 1920년대에 건립된 이 우체국의 도면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게 부러웠다고 말했다. 리모델링전문업체인 코렘시스 홍명희 사장은 "건물의 안전과 비용절감을 위해서 도면기록은 반드시 보존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호영 기자 hy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