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포로'가 된 이땅의 보통사람들..이평재 창작집 '마녀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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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재한다.
그것은 정상인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다가 "욕망의 불씨"를 만나 발화하곤 한다.
작가 이평재(42)씨의 첫 창작집 "마녀물고기"는 다채로운 인간군상을 통해 "우리 시대 사이코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진정 누구인가"를 되묻고 있다.
이 발언은 소설집 속 9가지 중단편들에서 마녀물고기와 거미인간,푸른고리문어 등 낯선 소재들과 신비한 세계를 통해 수면위에 떠오른다.
작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훌쩍 뛰어 넘어 도발적인 상상력을 판타지 신화 민담 고대문명들과 섞어 들려준다.
이런 경향은 내면의 심리진술에 주로 의존했던 90년대 여성작가군과 차별화된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표제작 마녀물고기는 '해그피시(hagfish)'라 불리는 먹장어의 서양식 표기다.
이 고기는 제 몸으로 매듭을 만든 후 이를 나사못처럼 회전하며 상대 물고기의 몸속을 파고들어 내장을 파먹는 속성을 지녔다.
정신병원에 수용된 주인공 의사는 자기 몸속에 깃든 마녀가 해그피시처럼 영혼을 송두리째 갉아먹었다고 절규한다.
껍질만 남은 인간은 다른 단편 '거미인간,아난시'에도 등장한다.
아프리카 민담에 나오는 아난시는 거미집을 지어 천상에 가서 마법의 이야기상자를 가져 온 거미인간.
작중 '변변한 지면 하나 얻지 못하는 한심한' 소설가는 필명을 날리는 대가로 아난시에게 영혼을 판다.
아난시가 사라진 뒤 그는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의 몸에 거미처럼 가시털이 돋고 있음을 발견한다.
창작의 고뇌가 변신을 초래하는 순간이다.
글쓰는 고통은 단편 '푸른고리문어와의 섹스'에서 한층 고조된다.
성애소설을 쓰려는 소설가 '나'는 글쓰기가 죽음에 이를 정도로 격렬한 아픔과 환희와 절망임을 체험한다.
창작모티브를 얻으려는 나는 창녀로 분한 연인과 '섹스게임'을 하는 한편 푸른고리문어에 성기를 물리는 환상을 경험한다.
마녀물고기,아난시,푸른고리문어 등은 '욕망의 악마성'을 상징한다.
그들과 관계를 맺은 작중 인물들은 '욕망의 포로'가 된 이땅의 보통사람들이다.
단편 '만다라케 언덕에 서다'와 '마술에 걸린 방'에 등장하는 수태와 낙태의 강박에 시달리는 인물들도 그렇다.
수태를 염원하는 여인은 유전자조작으로 예정된 미래를 갖고 태어날 아기를 주문해야 하는 상황에 마주친다.
또 다른 여인은 낙태수술의 실패로 태어나 구박받았던 자신의 성장기를 돌이키며 낙태수술일을 맞는다.
그러나 이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한다.
욕망의 성취가 '자아상실'이란 혹독한 대가를 요구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김진수씨는 이들 작품을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떠나는 머나먼 탐구와 모험의 여정"이라고 설명했다.
작가 이씨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화가생활을 하다가 지난 98년 단편 '벽속의 희망(이 작품집에선 마술에 걸린 방으로 바뀜)'이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전업작가로 전환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