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실리콘 유럽은 실리콘 밸리에서의 대학살을 모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 반도체 메이커들이 1분기 매출이 50%나 감소하는 비참한 상황을 보고하는 와중에도 인피니온 테크놀러지스, 로열 필립스 일렉트로닉스, ST마이크로일렉크로닉스 등 유럽의 '빅3'는 대체로 양호한 상황을 유지했다. 이 회사들의 주가도 미국 경쟁사의 주가를 능가했다. 유럽대륙의 정상급 칩메이커들은 탄탄한 내수시장이 뒷받침되고 침체된 PC시장에도 적게 노출돼 있어 정보통신 혹한기를 견뎌나가기가 보다 수월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 회사도 추락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유럽경제 침체의 조짐이 늘어남에 따라 빅3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더 이상 튼튼한 내수 시장에 기댈 수 없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기술부문의 침체조짐은 PC를 넘어 유럽 반도체 생산량의 3분의 1을 소화하고 있는 무선통신 부문에까지 번져 나갔다. 이같은 상황은 지난 6월12일 핀란드의 휴대폰제조업체인 노키아가 매출의 급격한 감소를 예고,시장을 놀라게 하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곧이어 STM, 필립스, 인피니온이 모두 이번 분기와 올해에 매출이 가파르게 하락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투자자들은 시가총액이 모두 1백60억달러에 달하는 빅3에 일격을 가하며 이들 주식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제 생동감있는 유럽 반도체 분야의 꿈은 사라진 것일까. 아직은 아니다. 매출은 아래쪽으로 비틀거리며 추락하고 있더라도 분석가들은 여전히 유럽의 거대 반도체메이커들이 미국 경쟁사들 만큼 나쁜 상황에 처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3사 모두 광범위한 시장에 제품을 판매하고 있어 특정 분야의 침체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 회사 매출의 4분의 1 또는 그 이상이 PC, 통신사업에 비해 훨씬 덜 불안한 자동차와 소비가전같은 산업에서 나오고 있다. 증권사인 위트 사운드뷰 그룹의 스콧 랜달은 "상황이 아주 좋은 것도 아니지만 아주 나쁜 것도 아니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