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미진(39)씨는 신작장편 '그 여름 정거장'(문예중앙)은 순정한 꿈과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신세대들의 유럽 배낭여행기'다. 로마와 파리 바르셀로나 등 유럽도시의 눈부신 풍광 아래서 남녀의 사랑과 실존의 현주소를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는 영상세대의 감성으로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무너진 조선왕실의 후예 이빈은 암선고를 받은 뒤 유럽으로 생애 첫 '탈출'을 감행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문중의 사육'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고픈 열망에서다. 비슷한 시각,미대 여학생 유준은 일상의 권태로부터 도피해 유럽으로 떠난다. 그들은 로마 근교의 유적지 오스티아안티카에서 운명적으로 상봉한다. 유럽에서의 빈은 '세계화'라는 구호아래 던져진 빛바랜 한국근대사의 상징이다. '펑키스타일족'의 준은 서구문명에 물든 신세대의 전형. 빈은 준의 도발적 면모에서 자유의 냄새를 맡고 '자연스러운' 즐거움을 맛본다. 준도 빈에게서 첫 '감전'을 경험한다. 로마-니스-모나코-바르셀로나-파리를 거쳐 남프랑스 아를에 이르는 여정에서 이들의 감정곡선은 절정으로 치솟는다. 아를은 고흐가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곳.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전부를 던질 수 있는 사랑을 확신한다. 불행히도 작중 복선들은 비극을 예고한다. 바르셀로나 구엘공원에서 들려오는 '지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바흐의 샤콘느,아를에서 접한 "'별들의 세계'로 가기 위해 죽음의 세계를 통과해야 한다"는 고흐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다른 배낭여행족들의 부푼 희망도 초라한 결실로 귀결된다. 대학생 원래는 '야망'을 품고 유럽에 왔지만 '피로'만 안고 귀국한다. 그러나 "아,이런 것이 외로움이구나.그래서 사람들은 외로움을 지우기 위해 아무나 만나는구나"라는 준의 독백처럼 낯선 곳에서의 체험은 먼훗날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소중한 자산이다. 8월15일 에펠탑에서 외친 '만세삼창'에 한국 대학생들이 까닭모를 '뿌듯함'에 젖는 것도 '모처럼' 실존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작중인물은 "선배들은 이데올로기 문제라는 상대가 있었지만 우리 세대들은 싸울 대상이 없다"고 토로한다. 시대적 정체성을 상실한 세대에 여행은 '꿈의 출구'인 셈이다. 작품속 투우광경에서 느낀 인간의 잔혹성,야간열차에서의 고행,로마 스페인광장의 야간축제구경 등은 이 소설을 여행기로 읽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표현돼 있다. 특히 유럽의 풍광들을 그린 작가의 스케치들과 e메일 '은어'들을 그대로 도입함으로써 인터넷세대와 영상세대의 코드가 한몸이 되고 있다. 김씨는 지난 95년 장편 베스트셀러 '모차르트가 살아있다면'으로 등단한 뒤 장편 '자전거를 타는 여자' '우리는 호텔 캘리포니아로 간다' 등을 내놨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