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7년 11월28일 오후 6시가 조금 지난 시각.임창열 경제부총리가 도쿄 가스미가세키(霞ケ關)의 우중충한 대장성 빌딩에 불쑥 들어섰다. 아직 임명장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시점. 국가부도가 목전에 닥친 터여서 신분에 걸맞은 외교적 예우를 기대하는 것은 당초부터 무리였다. 임 부총리는 그러나 빈손으로,그것도 불과 30여분 만에 내쫓기듯 되돌아 나왔다. 일본이 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명확한 상황판단이 없었던 탓이었지만,그렇다고 임 부총리를 나무랄 일만도 아니었다. 교과서 문제로 양국간에 바짝 열이 올라있던 시점이고 한국의 대통령은 한창 일본인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던(?) 중이었다. 감정도 현실이라면,한국과 일본은 사소한 축구시합에조차 목숨을 거는 매우 특별한 관계라는 점도 분명하다. 경제 문제는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일본이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과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할 때마다 우리 경제도 크고 작은 충격파를 받아들여야 했다. 시계추는 일본의 장기 경기곡선과도 궤적을 같이 하는 것이어서 10년 불황의 끄트머리에 서있는 최근의 일본이 다시 우익편향으로 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부끄러운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를 공용어로 쓰자"며 탈아론을 외쳤던 사람은 19세기 후반 당시 문부상이었던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였다. 아시아로 돌아서도 골치 아프고 탈아론으로 나아가도 이웃나라를 피곤케 하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대동아의 꿈도 일본인에겐 언제나 진행형이게 마련이다. 지난 97년 아시아국가들이 외환위기 도미노에 빠졌을 때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을 주창했던 것은 하나의 작은 사례다. 물론 AMF가 다테마에(建前·명분)였다면 '엔 동맹'은 '혼네(本音·속셈)'였다. 인도네시아와 태국 대만 한국이 모두 국가부도로 말려들었으니 "아시아는 일본이…"라는 발상이 나옴직 했다. 그러나 미국이 말 한마디로 이를 일축하면서 불과 두달만에 "아니면 말고…"식이 되고 말았고 YS정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헛발질을 해댔다. 통화의 국제화는 그에 상응하는 '아량과 혜택'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로마든 대영제국이든 오늘의 미국이 모두 엄청난 무역적자를 보고 있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아시아 인근국들로부터 막대한 흑자를 긁어 모으는 일본의 엔화가 국제통화가 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 엔화를 보유한 나라와 국민들이 없는데 무엇으로 엔의 국제화를 추구한다는 말인가. 문제는 한국 정부가 허공에 발길질을 해대는 것도 외환위기 와중의 97년 당시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가 걸핏하면 핏대를 세웠다가 또 금세 잊어먹는 것은 실로 고약한 버릇이다. 미국에서 흑자를 벌어 쓰는 나라중 'O-157'사건을 그토록 집요하게 문제 삼았던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YS는 클린턴으로부터 '한번만 봐달라'는 전화를 받고서야(10월27일) 이 문제를 덮었지만 미국의 싸늘한 냉소속에 국가부도사태가 터진 것은 그로부터 한달여만이었다. 여우처럼 현명하지 못하기는 지금도 다를 바가 없다. 정부가 앞장서서 공적을 만들어내고 문제를 증폭시키는 것은 언제나 정부 안에 약점이 있을 때다. 지금 일본이 고이즈미 체제를 출범시키면서 아시아국들과 고의적인(?) 마찰을 빚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국론통일을 시도하는 것같은 인상을 주고 있기는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거나 "두고두고 후회하도록 하겠다"는 얘기는 함부로 쓸 말이 아니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