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 전시장. 2m이상 크기의 대형 석고 조각물들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휴대폰과 오토바이를 제외하곤 모든 게 낯설다. 얼굴을 가린 레바논 무장세력인 헤즈볼라군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히말라야의 고산지대에 서식해 인간들이 가장 보기 힘든 동물이라는 설표범 다섯 마리가 마치 관람객에게 달려들 듯 뛰어오르는 모습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한쪽 가슴만 남은 젊은 여인이 권투장갑을 낀 채 전투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나디아(여자권투선수)',피를 흘린 채 경찰에 끌려가는 '인도네시아 시위자',아버지가 아들에게 총 사용법을 가르치는 '아이들의 게임',한 소녀가 엄청나게 큰 신발을 신고 핸드폰 통화 중인 '부기 신발' 등 설치 조각물들은 혼돈스러울 정도로 무질서하다. 바닥에는 바로 이런 작품 이미지가 담긴 컬러 인쇄물 수 천장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로댕갤러리 기획 초대로 전시회를 갖고 있는 왕두(王度·45)는 중국출신 재불작가로 국제 미술계에서 급부상한 조각가다. 작가가 출품작 15점을 통해 던져주는 메시지는 '일회용 현실(Disposable Reality)'이라는 전시제목이 암시하듯 우리가 매일 접하는 어지러운 현실 그 자체다. 그는 TV 신문의 광고내용에서부터 소비제품,심지어 정치적 사건까지 정보 과다시대의 미디어 이미지들을 재현시키는 작가다. 단순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일회용으로 소비되고 버려지는 미디어 이미지의 경박함과 허망한 현실을 유머와 풍자를 곁들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광저우(廣州)에서 미술을 전공한 왕두는 1989년 민주화시위 참여로 투옥됐던 행동파 작가다. 프랑스정부의 도움으로 지난 90년부터 파리에 정착해 작품활동을 펼쳐온 그는 90년대 중반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99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미디어 저변에 숨겨진 의미를 파헤치려고 하지는 않는다. 단지 미디어 이미지가 벼룩시장 좌판대에 올려진 상품처럼 소비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런 점에서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작가가 주목받는 이유는 2차원적인 미디어 이미지를 3차원의 조각형태로 재현해 냈다는 점이다. 삼성문화재단 김승덕 객원연구원은 "미디어라는 주제를 비디오나 설치 등으로 표현한 작가들은 많지만 그처럼 3차원의 조각으로 구현해 낸 작가는 극히 드물다"고 설명한다. 중간재료로 쓰이는 석고를 소재로 쓴 점도 이채롭다. 묘사력이 뛰어난 왕두는 석고에 불투명 수채물감만을 사용해 거친 느낌을 주면서도 '일회용 현실'에 딱 알맞은 이미지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셈이다. 볼거리가 많지 않은 게 흠이다. 9월2일(월요일 휴관)까지. 입장료 성인 4천원,학생 2천원. (02)2259-7781∼2 이성구 기자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