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패망 '秘史'] (1) '운명의 날 7월19일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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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일
D데이 사흘 전.
1999년 7월16일.
일찍 찾아온 무더위.
행인조차 찾아보기 힘든 오후.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검정색 체어맨 한 대가 여의도 광장 한 쪽에 위치한 금융감독위원회 청사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뒷좌석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사람은 뜻밖에도 김우중 회장.
김 회장은 고개를 숙인 채 차에서 내려 현관 로비를 지나 오른쪽 복도 끝 임원용 엘리베이터로 총총히 걸어갔다.
금감위 경비원들은 김 회장이 행여 외부인의 눈에 띌까 그의 주위를 막아 섰다.
11층 엘리베이터에서 금감위원장 집무실까지는 불과 10보 정도.
붉은 카페트 저편에서 이헌재 금감위원장이 굳은 표정으로 걸어나왔다.
이 위원장은 애써 미소를 띠려 했지만 웃을수록 얼굴은 묘하게 뒤틀렸다.
"이미 마음을 비웠어요. 경영권에 연연하지 않을테니 조용하게 협조융자를 도와주세요. 아시다시피 3조∼4조원만 지원해 주면 충분히 살 수 있지 않소"
김 회장은 '조용하게'라는 말을 여러번 되풀이했다.
"협조융자 외에 만기가 하루 이틀짜리로 몰렸던 초단기 CP를 만기 6개월짜리로 바꿔 달라는 요구도 있었습니다. 김 회장은 명예롭게 물러날 기회를 달라는 말을 몇번씩 강조하기도 했어요"
당시 금감위 국장급이었던 S씨의 증언이다.
"회장님,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시장이 납득할 만한 확실한 자구계획을 내놓으셔야 합니다"
이 위원장은 몇번씩 '시장이 납득할 만한'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시간이 흘렀다.
이 위원장이 인터폰으로 담당국장을 찾았다.
서근우 금감위 제3심의관이 들어갔다.
서 국장은 이 위원장으로부터 메모를 건네받고 나왔다.
서 국장은 이헌재 구조조정 라인의 2인자였다.
김 회장과 이 위원장은 항목마다 서로 확인 재확인을 해가면서 각서를 썼다.
이날 회동에서 김 회장은 개인 재산으로 주식 1조2천5백53억원, 부동산 4백52억원을 내놓기로 하고 이와 별도로 그룹의 주식 및 부동산 등 10조1천3백45억원 상당의 자산을 담보로 제공하기로 이 위원장과 합의했다.
이 위원장은 김 회장이 담보조 재산목록을 이야기할 때마다 관련 서류를 들추었다.
'재산목록이며 가액은 내가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김우중과 이헌재의 만남은 이날 외에도 몇차례 더 있었다.
그러나 이날의 단독 면담은 대우그룹 처리의 한 분수령이었다.
이헌재는 치밀한 각본을 세워놓고 김우중을 끌어들였지만 김우중으로서는 이번 고비만 넘기면 문제가 해소될 것으로 기대를 걸었다.
두 사람의 생각은 처음부터 많이 달랐다.
D-2일
다음날인 7월17일.
제헌절이자 토요일이었다.
역시 뜨거운 날씨.
대우 본사와 잇닿은 힐튼호텔은 남대문 쪽 급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두툼한 서류봉투와 가방을 든 신사들이 속속 힐튼호텔 회전문을 밀고 들어섰다.
먼저 장병주 대우 사장이 호텔 직원들의 큰절을 받으며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한참 뒤 서류뭉치를 들고 들어선 사람들은 제일은행 이호근 상무, 금감원의 김상훈 부원장, 허만조 신용감독국장, 한백현 신용감독국 팀장 등이었다.
물론 한두 사람씩 실무자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대우측에서는 실무책임자로 김용호 구조조정본부 상무가 미리 와 있었다.
이들은 각자 '보스'들의 지시를 받고 휴일에도 불구하고 힐튼호텔에 모여들었다.
사실 휴일이고 뭐고도 없었다.
김우중 회장이 이헌재 위원장을 찾아갔던 하루 전 16일엔 뜻밖에 종합주가지수가 40포인트나 폭등, 1,020.82로 치솟았다.
그러나 시장이 문을 닫은 시간인 오후 5시께부터 '대우그룹이 다음주초 부도난다'는 루머가 급속히 증권가에 퍼져 나갔다.
사실 '대우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는 사실은 7월 들어서면서부터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사를 쓰면 정말로 간다'는 우려도 많았다.
결국 용감한(?) 일부 언론은 16일 밤 '대우 부도 위기' 등의 헤드 타이틀로 1면 기사를 갈아끼웠다.
17일 아침 서울시내에 배포될 일부 신문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청와대 재경부 금감위는 17일 아침 초비상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제헌절인 이날 힐튼호텔에서 대우 관련 실무책임자들의 회의가 열린 것이었다.
이날 청와대에서도 강봉균 재경부 장관, 이헌재 위원장, 이기호 경제수석 등 경제팀 핵심 3인방의 구수회의가 이어졌다.
총대를 금감위가 메기로 한 것도 청와대 회의에서였다.
다음은 힐튼호텔 회의에 참석했던 금감원 관계자의 증언.
"청와대에선 장관들이, 힐튼호텔에서는 실무책임자들이 모였어요.
물론 청와대와 힐튼호텔 사이에 부지런히 전화연락들이 오갔습니다.
하루 전에 김 회장의 항복을 받기는 했지만 과연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느냐는 걱정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오형규 기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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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 = 오형규.이익원.최명수.조일훈.김용준 기자
◇특별취재팀=오형규·이익원·
최명수·조일훈·김용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