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北京)의 한 경제잡지사 류메이(劉梅.32) 기자는 최근 컴퓨터를 산 뒤 "은행이 고맙다"고 말한다. 은행 덕에 1만2천위안(1위안=약 1백60원)짜리 데스크톱PC를 2천4백위안에 장만했다. 그의 거래은행인 베이징상업은행이 컴퓨터업체인 팡정(方正)과 공동으로 제공하고 있는 "컴퓨터 대출 서비스" 덕택이다. 이 서비스는 매입 때 가격의 20%만 내고 나머지는 은행에 1년 할부로 내는 식이었다. 그는 매장에서 신분증과 통장확인 등 간단한 절차를 밟고 꿈에 그리던 컴퓨터를 샀다. 류 기자의 컴퓨터 장만은 요즘 중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소비자 신용대출의 전형이다. 중국 각 상업은행들은 다양한 소비자대출 상품을 만들어 고객을 유혹한다. 주택은 물론이고 자동차 교육 컴퓨터, 심지어 가구 구입 때도 대출을 해준다. 건설은행 베이징차오양(朝陽)지점의 경우 이달 들어 15일동안 25명의 소비자에게 3백60만위안을 빌려줬다. 일부 은행은 주요 백화점과 손잡고 신용 매입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은행이 소비자를 찾아다니며 대출세일을 벌인다는 것은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중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그런데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구체화되면서 지난해 들어 급증했다. 중국의 은행관계자들은 "정부 지시에 따라 자금을 기업에 배분하던 '정부 호주머니' 시대는 지났다"며 "이제는 수익성이 최고 영업기준"이라고 말한다. WTO 가입은 중국의 금융기관에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가입 후 3∼4년이 지나면 은행 보험 증권 등의 분야에서 외국계 금융기관들이 물밀 듯 들어오기 때문이다. "중국이 WTO 가입으로 가장 걱정하는 산업이 금융입니다. 선진국에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지요. 중국은 외국 금융기관이 들어오기 전 금융산업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입니다. 그만큼 변화 속도가 빠를 겁니다" 베이징대에서 경제법을 강의하고 있는 우즈판(吳志樊) 교수의 말이다. 중국의 금융산업 새틀 짜기 작업은 은행에서 시작된다. 핵심은 금융'기관'을 '기업'으로 전환시킨다는 것. 증시 상장은 그 구체적인 방법이다. 작년 11월 민셩(民生)은행이 상하이(上海)증시에 상장된데 이어 자오샹(招商) 광다(光大) 쟈오퉁(交通)등 5∼6개 굵직한 은행이 올 말이나 내년 초 상장을 앞두고 있다. 건설 중국 농업 공상 등 4대 국가소유 상업은행도 3∼4년 후 상장을 목표로 체제 개편 작업이 한창이다. 또 순수 민간자본으로 구성된 클린뱅크(부실채권 없는 은행) 10개를 신설, 경쟁을 유도할 계획이다. 중국 은행들이 '고객 앞으로'를 외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주식시장 변화는 더 빠르다. 중국은 지난 2월 증시 개편의 첫 작품을 내놨다. 외국인 전용 주(株)였던 B주를 내국인에게 개방한 것. 기형적인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던 A주와 B주를 통합하겠다는 신호였다. 지난 11일에는 외자기업의 중국 증시 상장 허용 방침이 발표됐다. 내년부턴 외국인도 중국 증시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이 두 조치는 마땅한 투자처가 없어 은행에서 잠자고 있는 예금을 생산활동으로 끌어내려는 뜻도 담겨있다. 그렇다고 중국이 외국인에게 자국 증시를 금방 열 것으로 보면 오산이다. 현대증권 상하이 지점의 조강호 소장은 "WTO 가입과 자본시장 개방은 별개의 문제"라며 "중국은 경제환경 및 금융산업 성숙도를 봐가며 증시개방 속도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분간은 체질개선에 충실할 거라는 얘기다. WTO 가입을 앞둔 중국의 금융당국 및 금융기관들은 세계 금융시장과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베이징=한우덕 특파원 wood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