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박쥐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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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이신우씨는 1980년대 중반 YWCA에서 색다른 웨딩드레스 쇼를 가졌다.
여느 웨딩드레스와 다름없던 발표작은 쇼가 끝날 때쯤 깔끔하고 예쁜 원피스로 둔갑했다.
드레스의 무릎 부분에 지퍼를 달아 길게 늘어진 아래쪽을 분리할 수 있도록 만든 게 비결.
빌려입는 값도 만만치 않은 웨딩드레스를 기왕이면 자기 것으로 맞춰 결혼식 후에도 신혼예복이나 평상복으로 활용하게 하자는 의도로 디자인한 것이었다.
비슷한 아이디어를 원용한 탈착식 의류가 나온 건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다.
IMF위기 이후 날씨에 따라 소매를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점퍼나 셔츠가 조금씩 선보이더니 올해엔 급할 때면 우산이나 헬리콥터로 변하는 가제트형사 모자처럼 상황에 따라 모양이나 용도를 바꿀수 있는 '박쥐상품'이 부쩍 늘어났다.
무릎 쯤에 지퍼나 찍찍이를 달아 보통 때는 긴바지로 입다가 비가 오거나 더우면 떼어내거나 말아올려 반바지로 바꿀 수 있는 게 나왔는가 하면 긴팔 티셔츠로 입다 싫증나면 옷에 표시된 선대로 잘라서 반팔로 만들 수 있는 것도 나타났다.
가방으로 들고 다니다 비 오고 바람 불면 펴서 걸칠 수 있는 점퍼, 재킷이지만 바람을 넣어 의자나 매트리스, 텐트로 사용 가능한 것도 등장했다.
휴대용의자를 겸하는 배낭, 테이블로 변하는 아이스박스도 있다.
레포츠인구가 급증한 탓인지 최근의 박쥐상품은 이처럼 레포츠용품이 주를 이룬다.
휴대하기 간편하면서도 갑작스런 날씨 변화등 만약의 사태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박쥐상품은 무엇보다 실용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등장한 의류 겸용 제품은 패션성이 강조된 때문인지 값이 녹록지 않다.
박쥐상품은 잘 활용하면 새와 쥐 노릇을 모두 하지만 자칫하면 어느쪽도 제대로 못할 수 있다.
리버시블 점퍼의 경우 양면으로 입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비싸지만 정작 양쪽으로 입게 되는 일은 적고 칸이 많은 핸드백도 쓸모가 별로 없는 것처럼 이론은 그럴듯 하지만 실용성 면에선 떨어지는 것이 많다.
다양한 용도에 혹하지 말고 꼭 필요한지, 얼마나 쓸 건지 잘 살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