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라(野村)가 누른 비상벨은 폭발적인 울림을 몰고 왔다. 외환대란 당시의 모간 스탠리 보고서에 맞먹는 것이었다. 모건 스탠리는 당시 "한국을 떠나라(Go out of Korea)"라고 썼었다. 당장 대우중공업의 회사채 발행계획이 취소됐다. 국내 금융기관들은 좋은 핑계거리를 찾았다.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져갔고 금융권의 자금회수가 재개됐다. 정부쪽 대우처리 작업을 맡았던 서근우 전 금융감독위원회 제3심의관은 "내용이야 다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신력 있는 외국기관이 자금난을 지적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던 대목"이라고 회고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었다. 풍전등화의 순간에 사령탑에서 고장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15일 김우중 회장의 뇌혈관이 터졌다. 김 회장은 결국 혈종(만성경막하혈종)을 수술하기 위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비즈니스의 세계는 냉엄했다. 김 회장의 급거 입원은 국제금융가의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장병주 (주)대우 사장 등 대우임원들은 "하필 이 순간에…"라며 땅을 쳤다. 역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힘이었다. 엿새 뒤 11월20일. 김 회장이 퇴원했다. 바로 그날 장병주 사장은 힐튼호텔에서 한경의 권영설 기자 등 대우 출입기자들을 만났다. "올해(98년)초 인수한 쌍용자동차 외에 모든 계열사가 흑자를 내고 있다. 그룹 전체로 올해 6천7백억원의 흑자가 난다. 연말까지 돌아오는 (주)대우 CP는 2조원 정도다. 자금 계획상 차질 없이 상환가능하고 그룹 회사채도 아직 2조2천5백억원의 여유가 남아 있다" 김 회장도 11월23일 힐튼호텔에서 퇴원후 처음으로 기자들을 만났다. "머리에 호스를 넣고 피를 3백㏄나 뽑아냈다. 1주일 쉬어본 것은 평생 처음이다. 일을 좀 더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며 그는 만면에 미소를 보였다. 기자들이 보기에도 혈색이 좋았다. 김 회장은 "내년에는 외자유치가 활성화되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다"며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엉뚱하게 꼬여갔다. 대우는 그해 12월7일 정.재계간담회 뒤 대우전자-삼성자동차 빅딜 계획을 발표했다. 다음날엔 '그룹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했다. 수도 없이 되풀이된 그룹 구조조정계획의 첫 작품이었다. 김태구 당시 구조조정본부장은 대우빌딩에서 99년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업종 10개 계열사로 축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바로 이 대목은 나중에 격렬한 논란과 토론을 불러 일으킨다. 첫 반응은 이헌재에게서 나왔다. "어떻게 된거야. 왜 대우가 먼저 내놔?" 이헌재 금감위원장의 첫 반응이었다. 대우문제가 꼬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재계 간담회는 김대중 대통령이 그룹 총수들과 청와대에서 함께 식사하고 구조조정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바로 다음날 5대그룹중 구조조정이 가장 미진한 대우가 거꾸로 가장 먼저 대통령의 구미에 맞는 계획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위원장이 '작업'에 착수한 것은 이보다 5개월여 앞선 98년 7월부터였다. 5대 재벌 재무구조 개선 약정에서부터 '작업'은 막이 올랐다. 노무라 보고서를 촉발시켰던 10월 회사채 보유제한 역시 '작업'의 일환이었다. 대우의 갑작스런 구조조정 계획 발표는 그런 점에서 이헌재의 허를 찌르는 일대 반격이기도 했다. 이 위원장이 찔러오던 칼을 빼앗아 역공을 가한 형국. 김 회장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전경련 회장으로서 수시로 김 대통령과 독대할 수 있는데다 김 회장의 공력도 산전수전을 겪었던 터였다. 정부의 재무구조 개선요구를 빅딜로 뒤집기로 한 김 회장의 전략은 그러나 결과적으로 김우중과 대우를 대파멸로 이끈 전주곡일 뿐이었다. 그럭저럭 1998년은 넘어갔다. 노무라 보고서 파문이 잠복해 있기는 했지만 2금융권은 "설마 대우가 망하랴" 하는 생각으로 여전히 대우 회사채와 CP를 사들였다. 불행의 씨앗은 쑥쑥 자라났다. 특별취재팀 = 정규재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면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