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패망 '秘史'] (5) '묘수냐...악수냐 (中)'..'히든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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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2월16일 이른 아침.
장소는 하노이대우호텔 스위트룸이다.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 김우중 회장 부부가 아침을 함께 들고 있다.
단출한 아침 식단.
호텔주인(김우중 회장)의 접객일 수도 있고 전경련 회장과 대통령의 만남이랄 수도 있는 자리.
배석자도 없는 자유로운 조찬이다.
대통령은 하루전 하노이에 도착해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새로운 한-베트남을 여는 정상회담이 있었고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인 1백50여명을 초청해 다과회도 가졌다.
저녁에는 판 반 카이 총리가 주최하는 만찬도 성황리에 열렸던 터다.
이날 역시 아세안정상회담 등으로 빡빡한 일정을 앞두고 있다.
이 모든 화려하고도 번잡한 외교행사들이 모두 하노이대우호텔에서 열렸다.
아세안 회담에 참석한 정상들중 5명이나 이 호텔에 묵었다.
조찬은 김 대통령이 김 회장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김 회장으로서는 뇌혈종 수술을 받은지 불과 20여일 만의 해외출장이었지만 대통령이 묵는 호텔의 주인이 접객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독대기회가 주어질 터였다.
대통령은 김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여러가지 일들을 잘해주고 있다며 운을 뗐다.
국가 경제를 위해 아이디어를 많이 내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노심초사하던 무역흑자가 점차 김 회장의 예측대로 대규모 흑자로 돌아서던 때였고 IMF 경제위기가 잘만 하면 조기에 극복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대통령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김 회장이 이 귀중한 시간을 놓칠리 없었다.
대우의 사활을 결정할 민감한 현안들이 김 회장의 머리를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시절이었다.
최근의 일만해도 그랬다.
불과 열흘전인 12월7일엔 삼성과 빅딜(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 맞교환)에 합의한 상태였다.
그러나 말이 합의일 뿐 빅딜게임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빅딜을 통해 적어도 4조원 정도의 현금을 확보해 그룹의 심각한 자금난을 수습한다는 치밀한 그림이 김 회장의 머리 속에 꽉 차 있었다.
그러니 대통령을 독대한 자리에서 다급한 주문이 없을 수 없었다.
더구나 장소는 김 회장의 무대였다.
사실 하노이건 타쉬켄트건 바르샤바건 후진국 무대에서라면 '대우'라는 이름 두자 만으로도 못할 것이 없는 터였다.
김 회장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무역금융 지원이 안되고 있습니다. 6조5천억원 정도됩니다. 연불 수출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김 회장이 금액을 구체적으로 확정해 말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김 회장으로부터 대통령과의 대화를 전해들었던 측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또 김 회장이 독대였다는 것을 빌미로 사실과 다른 얘기를 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어떻든 김 회장으로서는 결정적인 카드를 뺐다.
6조5천억원만 지원되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해외 금융기관의 동태가 급박하게 돌아갔고 노무라증권은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린다며 불난집에 부채질을 해대던 중이었다.
호락호락한 대통령은 아니었다.
어떤 자리건 가타부타를 즉답하지 않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대통령은 강봉균 경제수석에게 말해보겠다고만 대답했다.
물론 대통령은 강 수석에게 대우의 요청사항을 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강 수석은 대우측 요구를 깨끗이 거절했다.
"은행도 어렵다"는 것이 강 수석의 설명이었다고 익명을 요구한 한 대우 관계자는 회고했다.
김 회장의 독대 불과 몇시간 뒤 대우그룹은 나중에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삼성과의 빅딜합의문을 공개했다.
삼성에 대한 대우측의 공개적인 압박이었다.
삼성은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대통령과의 독대가 김 회장으로 하여금 무언가 과신하도록 만든 것일 수도 있었다.
대통령에게 요청했던 6조5천억원은 다름 아닌 빅딜의 지렛대요 교환물이며 패키지로 타결되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빅딜은 그러나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대우에 회복불능의 치명상을 주게된다.
사실 누구보다도 우호적인 관계였던 김 회장과 대통령이었다.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 회장이 되고 무역흑자 5백억달러론을 내세워 난국돌파 전략을 구사하던 당시로 돌아가면 더욱 그랬다.
김 대통령은 이즈음 기자들을 만났을때 "김 회장 대단한 사람이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 회장이 된 것 역시 '청와대 의중'이 작용했다는 유력한 증언들이 있다.
재계의 한 원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저쪽에서 다음 회장을 김우중으로 하자고 해요. 그러나 우리는 김회장을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어요. 모범적인 기업가로 볼 수는 없다는 거죠. 그런데 나더러 '김 회장에게 가서 회장 추대의사를 전하라'는 거예요. 거 참-. 그래 생각 끝에 전경련 쪽에 부탁을 했던거지. 그리 된 겁니다"
물론 재계가 전부 반대한 일을 청와대에서 밀어붙인 것은 아니다.
"97년부터 차기 회장은 김우중 회장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은 어느 언론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김 회장의 전경련 회장 취임은 박태준 자민련 총재가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기한 '빅딜'을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재계의 최대 과제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빅딜은 김 회장을 통해 구체화됐고 김 회장은 빅딜을 통해 일대도약을 꿈꾸게 된다.
[ 특별취재팀 =정규재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명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