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디지털 세상 속의 아날로그..임병동 <인젠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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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동 < 인젠 대표이사bdlim@inzen.com >
약속이 없는 휴일날 고장난 태엽식 시계를 고치러 명동에 갔다.
명동의 지하상가에 있는 수리점에는 동화책에 나올 법한 멋쟁이 할아버지 수리공이 있었다.
그 영감님은 건전지로 움직이는 시계는 시계가 아니라 단지 기계일 뿐이라며 젊은 나에게 깍듯하게 "이렇게 좋은 시계를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모든 사람이 디지털 방식의 전자시계를 찾는 시대에 태엽시계야말로 진정한 시계라며 확대경을 들여다보는 영감님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수리비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비싸게 나왔지만 이렇게 기분좋은 말을 듣고서 어찌 그냥 나올 수 있을까.
영감님께 몇 마디의 말을 건넸다.
일본은 이미 태엽시계를 수리할 만한 장인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오래된 롤렉스나 파텍 필립처럼 고급 시계를 수리할라치면 서울의 남대문 청계천 명동 등으로 온다고 한다.
시계 장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1초의 오차도 없는 디지털 시계보다 매일 태엽을 감아주는 구식 시계가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디지털 세상의 아날로그는 시계뿐만이 아니다.
LP와 카세트 테이프를 밀어내고 레코딩의 표준으로 자리잡은 CD의 세계에서도 그러하다.
CD는 디지털로 원음의 음질을 저장하기 때문에 LP를 눌렀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디지털 제일주의의 선구자인 CD플레이어에서도 하이-엔드라고 불리는 최고가품들은 하나같이 CD의 디지털 음원을 다시 아날로그로 변환시키는 컨버터를 내장하고 있다.
디지털 음원을 아날로그로 변환시킨다는 발상이야말로 '기술의 역행'이며 '과학에 대한 반동'이다.
게다가 아날로그 컨버터도 모자라서 진공관 앰프로 아직도 음악을 듣다니 말이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디지털 음원보다는 연주자의 혼열이 집중되는 바이올린의 생생한 감동을 원했던 것이다.
'정확'의 디지털이 '감성'의 아날로그를 이길 수 없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으리라.디지털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인간이고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감성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