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문학의 관(冠)'으로 추앙됐던 고려인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을 들추어 보면 '사륜정기(四輪亭記)'라는 글이 실려있다. 한여름 폭염을 피해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솔바람이 이는 그늘을 찾아 끌고 다닐 수 있는 이동식 피서용 정자의 설계내용을 적어 놓은 글이다. 평생 술과 시,거문고만을 좋아했던 이규보 만한 풍류객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못할 기상천외의 착상이다. 바퀴를 넷으로 하고 그 위에 정자를 짓되,사방이 6척이고 들보가 둘,기둥이 넷이며 동서남북에 각각 난간을 만들게 했다. 대나무로 서까래를 올리고 대자리를 엮어 지붕을 얹도록 한 것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거문고 주자,가인(歌人),시승(詩僧)각 한 사람,바둑 두는 사람 둘과 주인이 앉도록 설계된 6인용 정자다. 굴러가다가도 멈추면 정자가 된다고 해서 '행할 때가 되면 행하고 그칠 때가 되면 그치라'는 뜻이라고 사륜정에다 그럴 듯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도 풍류객의 멋이다. 이 기발한 사륜정은 아쉽게 설계에 그쳤지만 옛 풍류객들이 삼복 더위가 오면 한적한 자연을 찾아다니며 그속에 숨어들어 여유를 즐겨가며 보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들이 '피서(避暑)'라는 말 대신 더위속에 숨는다는 의미의 '은서(隱暑)'라는 말을 즐겨 썼던 까닭도 잠시나마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을 떠나 자연속에서 은자(隱者)처럼 숨어 지내며 세태인정을 관조하고 심신을 수양하는데 뜻을 둔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은서'란 지식계층의 '수양'이었지 서민들이 아무나 즐길 수 있는 '놀이'는 아니었다. 본격적 휴가철을 맞아 불볕더위와 열대야를 피해 피서지로 떠나는 행렬이 고속도로와 국도를 메우고 공항도 연일 만원이다. 전국의 해수욕장과 계곡에도 피서인파가 절정을 이루고 있다. 피서가 몸과 마음을 닦는 '수양'이 아니라 '놀이'가 돼 버린지는 이미 오래다. 더위를 못참아서라기보다 즐기기 위해 감수하겠다는 생각보다 역설적인 게 또 있을까. 피서다운 피서를 하려면 옛 상급(上級)풍류객들이 쓰던 '은서'의 의미를 되새겨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