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환의 '이슈탐구'] '유동성함정' 논란..저금리에도 소비.투자 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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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금리 4%대, 대출금리 7%대"라는 사상 초유의 저금리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식시장은 침체국면에서 허덕이고 있고 설비투자는 지난해 11월 이후 8개월째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등 저금리 효과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되자 우리 경제도 일본과 같이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진 것 아니냐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유동성 함정이란 금리가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계금리(critical interest rate:케인즈는 장기채권금리가 2%인 경우를 상정)까지 낮아져 통화공급을 확대하더라도 경제주체가 현금만을 보유하려 해 통화가 모두 퇴장(hoarding)하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돈을 아무리 풀어봐야 금리를 한계금리보다 낮게 유도할 수 없어 실물경제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게 된다.
통화정책이 무용지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케인즈도 실제 이런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 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침체시에는 통화정책보다는 재정정책이 유용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경제는 90년대 중반부터 케인즈의 머리속에서나 가능했던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다는 분석이다.
95년부터 재할인율을 0.5%로 인하하는 등 초저금리 기조를 지속, 콜금리(현재 연 0.01%)를 비롯한 주요 금리가 더이상 떨어질 수 없는 "제로(0)" 수준까지 하락했으나 경기침체는 계속되고 투자.소비심리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경제도 일본과 같이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해 일부 이상 징후에도 불구하고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우선 최근의 금리수준이 실질적으로 제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명목으로는 콜 4.75%, 국고채 6%대를 유지하고 있어 더 떨어질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지난달 초 콜금리를 0.25%포인트 내린 결과 시중 실세금리는 물론이고 은행의 여수신 금리가 줄줄이 인하되고 있다.
일본은 국채수익률(10년) 1.3%, 재할인율 0.25%, CD 수익률(3개월) 0.02% 등 명목금리가 제로에 가깝다는 점에서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
아울러 통화수요의 금리 탄력성과 통화유통 속도를 점검해 봐도 큰 이상이 없다는 것이 한국은행의 설명이다.
한은이 통화수요(M1)의 금리 탄력성을 추정해 본 결과 99년 중반이후 다소 커지고는 있으나 여전히 1 미만으로 최근의 저금리하에서도 비탄력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통화수요의 탄력성이 무한대에 가까운 것으로 정의되는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지 않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유동성 함정에 빠졌을 경우 급격히 하락하는 통화유통속도도 최근의 불황을 반영, 다소 떨어지기는 했으나 외환위기 이전보다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우리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금리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팽배하고 있는 불안심리로 저금리가 선순환구조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세계적인 불황으로 경기회복 전망이 불투명한데다 금융시장 불안과 구조조정 등 불확실성이 상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저금리라고 해서 기업들이 투자에 나설리 만무하다.
특히 내년에는 지자체 단체장 및 대통령 선거로 불확실성이 더 높아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기업들로서는 지금은 투자 확대보다는 현금을 확보해야 할 시기라고 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아울러 가계도 취업난에다 감원 등 불안심리에 시달리고 있어 적극적인 소비에 나설 엄두를 낼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러다 보니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주식시장 침체, 투자.소비 부진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처럼 유동성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불확실성의 조기 해소로 소비 및 투자심리를 회복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정국불안 해소나 구조조정 촉진이 대전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적극적인 재정.금융정책을 펴 최소한 경기가 더이상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이와 관련, 일부에서는 저금리 정책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으나 적어도 경기가 더 나빠지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정책의지로서 심리적 안정감 회복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통화당국은 9일로 예정된 금융통화위원회를 통해 이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시장에 전달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재정당국은 불안심리 팽배로 통화정책의 효과가 제한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재정정책을 경기조절 수단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는 죽은 경제학자인 케인즈가 유동성 함정론을 통해 우리 재정당국에 던지는 살아있는 메시지다.
< 논설.전문위원.경제학 박사 kghwchoi@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