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패망 '秘史'] (8) '빅딜 (下)'..다급한 쪽은 김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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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은 자신의 약점은 숨기고 상대의 취약점을 공략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삼성도 그랬고 대우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가면서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한 쪽은 그러나 대우였다.
삼성으로서는 대우의 전략을 파악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부는 삼성에 대한 금융제재까지 거론하면서 전방위 압박을 해왔으나 삼성은 이를 견뎌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다시 여름이 왔을 때 삼성은 의외의 강수,즉 법정관리를 선택했다.
그것은 김 회장의 그랜드 디자인이 파국을 맞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99년 1월31일 늦은 밤
청와대 서별관.
매서운 겨울 바람이 정원의 소나무를 한차례 흔들고 지나갔다.
"김 사장, 합의서에 사인을 하지 않으면 대우가 빅딜을 거부한 것으로 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이 자리를 고쳐 잡아가면서 김태구 대우자동차 사장을 채근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김 사장은 연신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식은 땀을 훔쳤다.
사위가 적막한 청와대였다.
"삼성은 이미 사인을 했는데 도대체 대우가 버티는 이유가 뭡니까"
"글쎄, (삼성자동차) 부채 문제가 먼저 정리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덜컥 안았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집니까"
결국 김 사장은 서명을 하지 않고 밤이 이슥해서야 청와대를 나왔다.
이날의 서별관 풍경은 강 수석이 '삼성차 선인수-후정산'안을 만들어 이학수 삼성 사장과 김태구 사장을 불러 합의를 종용하는 장면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1월22일과 23일 이건희 회장과 김우중 회장을 잇달아 청와대로 불러 빅딜 합의를 촉구한 상황이었으니 강 수석도 속이 타들어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문제는 돈이었다.
대우는 공장을 가동하고 협력업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금지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절대 합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김 사장은 그러나 이틀이 지난 2월2일 정부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금융감독위원회는 다음날인 2월3일 "두 그룹이 오는 2월15일까지 양해각서(MOU)를 교환키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3월22일, 승지원 담판
그러나 2월15일까지 교환키로 한 양해각서는 교환되지 않았다.
삼성은 SM5를 계속 생산해 주고 협력업체도 떠안아줄 것을 요구했지만 대우 생각은 달랐다.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한 SM5는 단종하고 부산공장 활용방안은 대우의 자체계획에 맡겨 달라는 입장이었다.
더욱 첨예한 대립을 불렀던 논쟁점은 삼성차 가치 평가문제였다.
'미래 현금흐름 할인방식(DCF)'을 적용하면 삼성차의 기업가치 하락은 불문가지였다.
이미 순자산이 1조원대의 마이너스(세동회계법인 평가)였던 데다 전도가 불투명했으니 삼성이 이 방식을 거부한 것은 당연했다.
삼성은 '기왕의 매몰비용은 제로'라는 입장을 유지할 뿐이었다.
삼성차의 가치문제는 곧 대우가 확보할 수 있는 자금 규모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과 김우중 대우회장의 3월22일 승지원 극비담판은 이런 상황에서 열렸다.
이헌재 금감위원장의 요청이기도 했다.
다급한 쪽은 그러나 쫓는 자, 김 회장이었다.
삼성의 금융계열사들이 대우CP를 회수하고 있었다.
빅딜의 그랜드 플랜이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김 회장의 발밑이 꺼져내리는 상황이었다.
승지원의 김 회장은 "이렇게 자금을 회수해가면 어떡합니까. 삼성 금융계열사들이 회수해간 8천억원부터 원상회복해 주세요"라며 매달려야 했다.
일은 꼬여 갔다.
극비로 마련된 승지원 담판이 어쩐 일인지 언론에 새나갔다.
기자들이 몰려들고 김 회장은 서둘러 승지원을 빠져나갔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과 이규성 재경부장관은 이날 밤늦게 서울 힐튼호텔로 두 회장을 다시 불러냈다.
다음날 또 합의문이 발표됐다.
이번 합의문에는 삼성 금융사들이 3천억원 가량의 운전자금을 대우에 대출해 주는 내용도 포함됐다.
다음날 김석환 대우차 부사장을 단장으로 한 삼성차 인수팀이 부산공장에 들이닥쳤다.
삼성은 그러나 공장안에 김 회장 숙소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끝까지 거부했다.
99년 6월11일, 금감위원장실
"대우CB 인수는 어렵습니다. 소액주주들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이학수 사장은 삼성그룹 전체가 자칫 대우부실 처리에 말려들 것을 우려했다.
수렁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예감이었다.
"내일까지는 결정을 주세요. 삼성이 빅딜을 거부하면 금융제재를 각오해야할 겁니다"
이헌재 위원장도 강경했다.
이학수 사장이 맞받아쳤다.
"차라리 법정관리를 신청하겠습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대우는 삼성의 자금지원을 요구했고 삼성은 거부했다.
여기에 대우전자의 부실도 문제였다.
대우전자에 대한 삼성측 실사팀장은 공인회계사이기도 한 안복현 제일모직 사장(당시 삼성전자 부사장)이었다.
숨겨진 부실에 대한 보고가雍?올라갔다.
결론은 '평가 불능'이었다.
정부는 다시 중재안을 냈다.
중재안은 △삼성 계열사들이 회사채 매입형태로 삼성차에 빌려준 1조2천억원을 떠안고 △대우측이 지정하는 대우그룹사의 전환사채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2조원을 지원한다는 방안이었다.
삼성 원로회의가 가동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강진구 이수빈 현명관 등 삼성그룹의 원로들이 내놓은 대안은 이건희 회장의 사재 출연이었다.
빅딜 무산에 따른 책임을 피해가려면 사재 출연이라는 메가톤급 '선물'이 있어야 했다.
이 문제는 이헌재 씨의 증언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그는 입을 닫고 있다.
파국, 99년 6월30일
삼성은 6월30일 서울 태평로 사옥에서 '삼성차 법정관리 신청'을 전격 발표했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주식 2조8천억원어치를 출연해 삼성차 부채와 협력업체 지원 등 현안들을 자체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정부 중재안대로라면 수조원의 부채를 인수함은 물론 삼성은 대우그룹의 주주가 돼야할 판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사재 출연 대상을 삼성생명 주식으로 결정한 것에는 삼성 재무팀의 숨은 계산이 있었다.
빅딜이 무산되면서 대우는 '운명의 7월19일'로 곧장 달려가게 된다.
[ 특별취재팀 =정규재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명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