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시가 뉴욕에서 날아든 베이지북(Beige book) 충격과 시스코 시스템스의 실적 악화 경고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나스닥 지수의 연이은 하락세와 경기 회복 지연 우려 등 온갖 악재에도 꿋꿋하게 버티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9일 금융통화위원회가 콜금리를 0.25%포인트 내리고 대우자동차와 현대투신 등 문제 기업에 대한 매각협상이 조만간 해결될 것이라는 정책 책임자들의 '희망적인' 발언이 잇따랐지만 증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이날 증시 폭락에 대해 베이지북과 시스코의 경고가 향후 국내외 경기 회복 전망을 한층 어둡게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최근 반도체 경기 바닥론 등으로 제기된 조기 회복 예상에 결정타를 먹여 판을 완전히 뒤집었다는 것이다. 구조조정이나 금리 인하보다는 '주가의 최고 재료는 역시 경기'라는 절대불변의 진리를 새삼 확인시켜준 것(대우증권 홍성국 부장)이라고 입을 모았다. ◇구조조정·금리인하 약발 없다=전날부터 국내 경제와 증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문제 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 진전을 시사하는 발언들이 잇따라 나왔지만 시장은 무덤덤했다. 지난 8일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대우자동차와 현대투신 등 외국과 협상 중인 몇몇 문제 기업의 처리를 이달 중 매듭짓도록 하겠다고 밝혔지만 주가는 오히려 하락했다. 금리 인하도 안 먹혀들기는 마찬가지다. 금융통화위원회가 이날 99년 5월 이후 처음으로 2개월 연속 콜금리를 내렸지만 추락하는 증시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노출된 재료로 해석됐다. ◇베이지북과 시스코 경고의 의미=베이지북과 시스코의 실적 악화 경고는 향후 경기전망이 어둡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이지북은 미국 제조업의 침체가 여타 산업 및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스코의 최고경영자인 존 체임벌린 회장도 "기업들의 IT(정보기술)부문 지출이 언제 바닥을 칠지 알 수 없고 시스코의 사업환경도 아직 바닥을 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동양증권 박재훈 차장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연초부터 금리를 인하하면서 6개월 뒤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봤지만 베이지북이 이런 기대감을 완전히 뒤집었다"면서 "추가 금리 인하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비관론을 심어줬다"고 분석했다. 그는 "시스코의 경고는 IT경기 회복이 멀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전망 및 투자전략=증시 전문가들은 국내외에서 다시 경기 논란이 불거지면서 주가가 박스권에서 헤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내다봤다. LG투자증권 황창중 팀장은 "나스닥 지수가 1,950선을 지켜내면 국내 증시는 540∼550선에서 횡보하고 1,950선이 깨지면 520∼540선으로 내려갈 전망"이라면서 "금융 건설주 등 금리 하락 수혜주와 실적 호전 우량주 위주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동원경제연구소 온기선 이사는 "새로운 경기 낙관론이 힘을 얻기 전까지는 국내 증시의 약세는 불가피하다"면서 "대형주를 피하고 경기를 타지 않은 내수 관련 중소형 실적주에 관심을 두는 게 좋다"고 말했다. 이건호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