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장경제 체제인가] (8.끝) 겉도는 '작은 정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백약이 무효' 요즘 우리 경제가 처한 상황이다.
한국은행이 지난 9일 콜금리를 두달 연속으로 0.25%포인트 인하했지만 주가는 오히려 곤두박질쳤다.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9,10일 이틀동안 경제정책협의회를 갖고 긴급하게 내놓은 30대그룹 규제완화 방안 등 경제회생 대책에 대해서도 시장의 반응은 역시 뜨악했다.
32개월만의 산업생산 감소, 34년만에 최악의 실적을 낸 수출, 작년 11월 이래 9개월 연속 뒷걸음질치고 있는 설비투자….
온통 '최악'의 수식어로 가득차 있는 우리 경제의 '복합 불황'은 어디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까.
정부 당국자와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 등 해외 경제의 계속되는 경기 부진을 으뜸 요인으로 꼽는다.
그러나 경제 일선을 뛰는 기업 당사자들의 얘기는 다르다.
"복합 불황의 핵심인 설비투자 감소를 외부 요인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김영수 LG전자 부사장)는 것.
"기업들을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묶어 출자총액을 제한하고 부채비율 상한선을 정해 일정 규모 이상의 자금 조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기업들의 설비투자를 가로막는 결정적 요인"(김종갑 산업자원부 산업정책국장)이라는 지적이다.
요즘 그나마 신규 투자여력이 있는 곳은 덩치 큰 대기업들인데 출자 제한의 사슬로 묶어 놓는 바람에 침체 경제의 돌파구가 꽉 막히게 됐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런데도 해당 부처는 이들 핵심 규제장치를 '내놓을 수 없다'며 버티고 있다.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정책협의회가 끝난 뒤 자청한 기자간담회에서 "이번의 일부 규제완화 조치에도 불구하고 30대그룹의 기존 출자총액 초과액은 내년 4월까지 해소해야 한다"고 되레 큰소리를 쳤다.
돌이켜보면 1997년말의 외환위기를 비롯해 우리 경제가 맞았던 고비의 상당 부분은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과 '지시 경제'에 의한 '정부 실패'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지적이 점차 설득력을 높여가고 있다.
1980년대 정부의 무리한 중화학공업 육성과 산업합리화 조치가 시장원리에 의한 산업간 세대 교체의 흐름을 틀어막았고 반도체 외에는 딱 부러진 대표 산업을 갖지 못하게 된 우리 경제는 외환위기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야 했다.
행정만능주의적 시장 개입의 폐해는 무엇보다도 민간경제의 자생력을 가로막는데 있다는 지적이다.
유정호 국제교류협력센터 소장은 "정부가 할 일은 민간에 대한 개입과 간섭 등 시장경제의 상점주(商店主) 노릇이 아니라 시장이 가장 잘 작동할 수 있게끔 여건을 만드는 후견인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정부가 해결해야 할 최대 과제는 재정적자를 줄이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시장경제에 대한 능력적자 및 신뢰적자(performance & trust deficit)를 없애는 일이 더 급하다… 그동안 정부는 효과도 없는 정책 실현을 위해 너무나 많은 세금을 낭비해 왔다. 납세자들을 고객으로 생각하는 기업가형 정부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가행정 점검반'이 내놓은 보고서의 이들 구절은 한국 정부에도 예외일 수 없다.
이학영 기자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