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이 나치 독일의 구상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새로운 유럽질서를 만들겠다는 나치의 전쟁 캠페인중 하나가 바로 국제 통화기구의 창설이었다. 영국과 미국이 차례로 이 심리전에 뛰어들었고 이것이 발전해 IMF와 IBRD 창설로 구체화됐다. IMF설립안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영국 재무부 자문관이기도했던 '일반이론'의 케인즈였다. 케인즈의 아이디어가 구체화될 즈음 미국 재무부 고문이었던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도 비슷한 제안을 발표했다. 이 두사람이 미국과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경쟁적으로 아이디어를 구체화해갔고 초안이 만들어진 것은 때이른 42년이었다. 당초 '중앙은행의 중앙은행'을 생각했던 이들의 구상이 케인즈의 제안에 따라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이름을 갖게된 것은 44년 브레튼우즈의 값비싼 호텔 '포트 워싱턴'에서였다. 국제질서는 역시 '이긴 자'가 만드는 것이기도 해서 출자액에 따라 지분을 갖는 IMF 구조상 실질적인 운영권은 줄곧 미국이 장악해왔다. 다만 지적재산권을 갖고있는 영국의 입장이 고려돼 '총재'만큼은 유럽 사람이 맡아왔다. 미셸 캉드쉬에 이어 분데스방크 총재였던 호르스트 쾰러가 IMF총재를 맡게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일본은 IMF대표를 총재 아닌 '전무'로 부르고 있는데 실질적인 지배구조를 생각한다면 이 표현이 맞을 것이다. 지난 97년말 한국인들 앞에 그토록 강력한 이미지로 등장했던 IMF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다소는 거들먹거리는듯한 태도였던 캉드쉬가 부지런히 서울을 들락거렸고 머리를 짧게 깍은 휴버트 나이스 단장이 이끄는 대표단과 한국 정부가 밀고 당겼던 힐튼호텔에서의 협상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말이 IMF대표단과의 협상이었을 뿐 실제로는 미국 재무부의 차관보였던 데이비드 립튼이 극비리에 서울에 들어와 협상을 막후지휘했던 일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2백여 항목에 이르는 방대한 이행각서에 김영삼 대통령은 물론 김대중 후보 등 대통령 출마자들까지 서명해야 했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던 날 편집국에 걸려온 많은 전화 목소리들이 지금도 기자의 귀를 울리고 있다. 누구랄 것없이 울먹이던 목소리며,이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두려워하던 떨리는 억양들이며…. 벌써 꽤 시간이 흐른 모양이다. 오는 23일자로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남아있던 잔금 1억4천만달러를 모두 갚아 IMF차입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게 된다고 한다. 국치(國恥) 운운했던 당시를 생각하면 우선은 축하할 일임에 틀림없다. 3년8개월 만이라니 전례없는 우등졸업인 것도 분명하고…. 그러나 가슴 속으로부터 자축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기자 만은 아닐 것이다. 34년만의 최악의 수출감소세며,4년전 당시 수준으로 돌아간 주가며,2%대의 저조한 성장율등 숫자들로 입증되는 경기 침체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뒤죽박죽이 되어있다는 느낌,통합보다는 분열,화해보다는 증오,중심세력이 배제당한채 기회주의자와 원리론자들이 기묘하게도 야합하고 있다는 생각,합리적 개혁보다는 구호화한 슬로건에 사회가 휘둘리고있다는 두려움이 지금 우리를 주춤거리게 하고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과거'에의 분노에 사로잡혀 지난 수십년간 쌓아왔던 '모든 것'을 폄하하기에 이르고 급기야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있으니 민주·시장경제 개혁은 걷돌 수 밖에 없기도 할 테다. 참고로 한경의 사시(社是)가 바로 민주시장경제의 창달이다. 어떻든 빚을 다갚아 IMF를 졸업하게는 되었다지만 개혁노선은 오히려 시장경제로부터 더욱 멀어지고있으니 이 아침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게된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