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인연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만남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오직 한 사람을 찾아 밤하늘 은하계를 떠돌았다. /대기권을 진입하면서 불타버린 돌멩이 하나로/그녀는 이 지상에 나를 찾아왔다." "정지용문학상"을 받은 송수권(61) 시인의 열번째 시집 "파천무"(문학과 경계사)는 인연의 소중함을 오묘한 언어로 빚어내고 있다. 이순(耳順)을 지낸 시인은 달관과 관조의 시선으로 삶의 진리를 그윽히 응시한다. 시인은 표제작에서 떠돌이별이 수 천만번의 파천무를 거듭한 뒤에 이뤄내는 만남과 사랑,인연은 우주질서의 그 너머에서 온 말들임을 갈파한다. 그리고 속세에서 그것들과 온몸으로 부딪치는 인간은 찰라에 피고 지는 '물꽃'과도 같은 존재임을 역설한다. '세월이 이처럼 흘렀으니/그대를 잊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나는 오늘도 채석강가에 나와 돌 하나 던집니다/강은 온몸으로 경련을 일으킵니다/상처가 너무 깊은 까닭입니다/상처가 너무 큰 까닭입니다/돌 하나가 떠서 물위에 꽃 한송이 그립니다/인제는 향기도 빛깔도 냄새도 없는 그것을/물꽃이라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오늘도 채석강가에 나와 돌 하나 던집니다'('물꽃' 전문) '상처위에 핀' 물꽃은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물꽃같은 존재인 시인에게 이별과 망각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다. 사랑과 인연처럼 우주질서 그 너머에서 온 말들이기 때문이다. 시 '그녀가 내 곁에 있다'가 그 물증이다. '이제 그녀는 내 곁에 없다/그러나 그녀는 항상 내 곁에/살아 이렇게 아홉개의 피리구멍으로 숨쉰다/…/사랑은 말로 세우는 질서가 아닌 우주 너머 질서인 것/오직 한 사람을 찾아 밤 하늘 은하계를 떠돌다가/이렇게 나를 찾아와 빗돌로 잠드는 것/그녀는 나의 하늘돌!나의 파천무/…/지금은 내 생애의 예순번째의 겨울이고/그녀가 남기고 간 코트자락 펄럭이며/나는 흰눈을 맞으며/쓸쓸한 밤길을 그녀와 함께 걷고 있다' 그녀는 갔지만 내가 그녀를 보내지 않은 것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경지에서 이뤄진다. 그것은 노자의 '언무언'(言無言: 말을 했지만 말한 것이 없음,혹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음)의 경계와도 상통한다. 그 세계는 득도한 고승과 한줌 재로 변한 밀잠자리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시 '고승'에 고스란히 구현된다. 무얼 남기겠다고 주접떨지 않아도 늦가을 창공처럼 '시원한'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볏잎 뒤에 붙은 밀잠자리 한 마리/속나래와 겉나래 두 닢/저 수많은 땡볕과 폭풍우를 치고와서/겹눈을 뜨고 날개는 수평 그대로인 채/손을 댔더니 겹눈도 나래도 바스라져/섬뜩해라,폭싹 재가 되는 걸!/ 무얼 남기겠다고/주접 떨지 마라/아 저 시원한 늦가을 창공/한 자락.('고승(高僧)'전문)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