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멍텅구리야,뭐하러 왔어.그만 돌아가"


오대산 월정사 회주 인허(85)스님의 첫마디다.


절의 사무를 보는 종무소를 통해 미리 약속을 하고 와도 일언지하에 퇴짜맞은 셈.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고...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야 노장은 외면했던 고개를 돌린다.


아직도 가지 않았느냐는 표정이다.


-좋은 말씀 좀 들으러 왔습니다.


"바늘귀만한 깨달음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아무 것도 모르는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겠나.다 부질없는 짓이야.허망한 소리 해봐야 구업(口業.입으로 짓는 악업)만 짓는 거지"


-오대산에 참 오래 사셨지요.


"그럼,출발이 여기(오대산 상원사)야.그러나 조그만 (깨달음의)경계라도 봐야 수행했다고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한 세상 헛되이 넘어가는 거야"


-헛되이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이란 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거야.자기 일이 분명하면 번뇌가 없어.머리가 복잡하고 정신이 어지러운 건 제대로 하는 게 없어서 그런 것이야"


-은사인 한암 스님은 말없이 수행하고 실천한 분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수행자에게 묵언(默言)을 강조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나요.


"본래 근본은 말이 없는 거야.말로 하는 건 다 망어(妄語,거짓말이나 헛된 말)거든.유가에서도 '근도자(近道者)는 간언(簡言)'이라 했어.도에 가까운 자는 말이 적다는 뜻이지.부처가 되려면 묵언정진해야 돼.요즘은 스님들이 너나없이 법문을 하는데 아무나 법문하는 게 아냐.한 소식 깨쳐서 부처의 경계를 봐야 법문을 할 수 있지.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의 8만4천법문을 그냥 전해주고 대변하는 것 뿐이야"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조금 본 사람은 그 경계밖에 모르지.강이나 냇물을 본 사람은 강이나 냇물만 알지 바다를 몰라.그러나 바다를 본 사람은 냇물도,강도,바다도 다 말할 수 있지.동서남북을 다본 사람은 사방천지를 다 알지만 한쪽만 본 사람은 그쪽밖에 모르는 것과 같아.동서남북을 두루 다 보는 것은 원견(圓見)이고 한쪽만 보는 것은 변견(邊見)이야.부처님의 세계가 바다요 원견인데 사람들은 자기가 본 냇물과 강물만 말하고 있지.그러나 어떤 선지식이든 도의 경지에 이르면 누군가 그를 알아주는 지음자(知音者)가 있게 마련이야"


-그러면 누가 깨달았다,못깨달았다 판단하고 말할 수 있나요.


"말로 하는 건 다 구업짓는 거지.구시화문(口是禍門)이니 수구여병(守口如甁)이라 했어.입이 화가 들어오는 문이니 병마개 막듯 봉하라는 얘기야.말 밖의 소식을 아는 것,그게 도(道)의 자리에 들어가는 길이야.그 자리는 말도 없고 말로 하기도 어려운 자리인데 누가 높다,낮다 비교하는 건 업만 짓는 거야"


인허 스님이 이토록 묵언을 강조하는 데는 내력이 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은사 한암 스님이 실천했던 무언의 가르침과 채찍,이를 통한 무소유와 하심(下心,자신을 낮춤)이 몸에 밴 탓이다.


노장이 수행했던 상원사 청량선원에는 24시간 내내 침묵밖에 없어 간혹 들리는 새소리가 반가울 정도였다고 한다.


-매 순간 하심을 유지한다는 게 생각처럼 잘 안될 텐데요.


"말로는 다 쉽지.그러나 하심이 극치에 이르려면 무엇을 보더라도 좋다,나쁘다 하는 분별심을 버려야 해.맛있다,맛없다 또는 좋다,나쁘다 하고 가르는 게 다 중생심이거든.부처님 말씀은 일미(一味)야.곡식은 달라도 맛은 한 가지란 말이야"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행법도 여러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근기(根氣)에 따라 상근기는 참선,중근기는 간경(看經),하근기는 염불이 적당한 수행방편이지만 도달하는 곳은 한가지야.힘이 더 들고 덜 드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걸어서 올라가나 비행기 타고 가서 내리나 산정상에 서기는 매한가지 아닌가.무엇을 하든 생각이 끊어지지 않도록 일념이 되는 게 중요하지"


-요즘 수행풍토는 어떻습니까.


가는 곳마다 예전같지 않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많습니다만.


"고전미가 다 없어진 세상이야.수행도 예전같지 않아.오계(五戒)도 못지키면서 (그것보다 훨씬 까다로운)비구계는 왜 받나.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이라,춥고 배고플 때에 도를 깨치려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어.살기가 편해져서 절제력이 없어"


인허 스님은 "지금 세상은 부처님이 와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이 천지인 오탁악세(五濁惡世)"라며 "지도자들이 도덕을 회복해서 성군의 정치를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허 스님은 1939년 상원사로 입산해 2년 먼저 출가한 속가(俗家)의 친형인 탄허 스님과 함께 조계종 초대 종정 한암 스님을 은사로 모셨으며 고령에도 불구하고 쉼없이 수행정진하고 있다.


지난 95년엔 한암문도회 대표로,96년엔 월정사 회주에 추대돼 월정사 전나무숲처럼 곧고 푸른 기상을 전하고 있다.


월정사(오대산)=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