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安昌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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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간이 비행장이 건설된 직후인 1917년 미국의 곡예비행사 아트 스미스는 한국인들에게 비행기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거꾸로돌기 급선회 나사형급강하의 묘기를 보여준 그는 마지막으로 창공에다 흰 연기로 '스미스'라는 이름을 써놓아 6만여명의 구경꾼들을 열광시켰다.
희문고보 재학시절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본 안창남(1900~1930)은 학교를 중퇴한 뒤 1918년 일본에 건너갔다.
도쿄의 오쿠리비행학교를 졸업한 그는 21년 일본 제1회 비행사 면허시험에서 1등으로 자격을 따내고 토쿄~오사카 간 비행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해 이름을 떨쳤다.
'안창남 모국방문 비행대회'가 열린 1922년 12월 10일은 대회장인 여의도를 비롯 영등포 노량진 마포 일대 한강변이 5만여명의 인파로 뒤덮였다.
안창남의 금강호가 여의도 주변을 일주하고 창덕궁을 돌아 다시 여의도 상공에서 갖가지 곡예비행을 보여주자 '안창남 만세'소리가 '한강물을 뒤집어 놓을 지경이었다'는 신문기사는 당시의 열광적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그 뒤부터 사이클로 명성을 얻었던 엄복동과 함께 '하늘엔 안창남,땅엔 엄복동'이란 유행어까지 생겼다는 것을 보면 그는 민족의 영웅이었다.
간토 대지진 때 피살됐다는 소문이나돌기도 했던 그는 뒤에 중국 상하이로 탈출해 산시성 옌시산(閻錫山) 군벌 막하에서 타이위안(太原) 비행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훈련비행중 사망했다.
안창남이 제56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항일 독립 군자금을 지원하고 한국인 비행대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벌이려 했던 공적이 뒤늦게 인정됐다고 한다.
물론 첫 민간 비행사로서 민족의식을 일깨운 공적도 인정됐다.
정부수립 후 포상한 독립유공자는 8천9백66명에 이르고 있다.
뒤늦게 친일 행적이 드러나 서훈을 박탈당한 인물도 있으나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 포상의 정확을 기하기 위해서는 포상을 신청할 유족도 없었던 안창남의 경우처럼 학자들의 공적발굴 포상이 바람직하다.
후손도 없이 고혼이 된 무명의 독립운동가가 어디 안창남 뿐이겠는가.